314829 님, 답변을 드립니다.

 

314829 , 상담원입니다.

지난 말에 글을 남기셨는데

설까지 지나서야 답변을 드리게 되었어요.

바로 다독여드리고 응원해 드렸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고등학교 기숙사서 같은 방을 쓰는 친구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는데

혼자서 속끓이는 게 힘겨운 한편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고 친구를 대하는 상황 자체가

친구에게 미안한 일 같아

마음이 많이 쓰인다고 적으셨어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정도로 애틋하고 좋은데

같은 공간에서 친밀하게 생활하며 감정을 다스리려니

그 또한 곤혹스러운 일이라 

도무지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고도

털어놓으셨고요.

 

정말 어렵죠, 그쵸?

누군가에게 깊이 반해버렸다는 것,

내 마음이 어떤 타인에게 속속들이 열리고 말았다는 것,

그거 참 근사한 일인데, 멋진 일인데,

그만큼 힘들기도 하니 말이어요.

 

설레는 마음을 감당하기에도 벅찬데

하루종일 내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를

스스로 검열하고 단속하며 친구 눈치를 봐야 하니

감정적으로 고단하고 피로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힘이 드신 게 당연한 상황 같아요.

 

게다가

저녁 때 헤어져 다음 날이 돼야 만나는 상황이면

밤 사이에 혼자 생각도 정리해 보고 마음도 추슬러 볼 텐데

생활 자체를 같이 하는 상황이니

편안히 차분히 숨을 고를 겨를도 

없다시피 하겠구나 싶어

걱정이 더 되고요.

 

상담원은 무엇보다도

친구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내셔도 괜찮다는 말씀부터

힘주어 드리고 싶어요.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도 잘못이 아니고

그 이야기를 미처 하지 못한 채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것 역시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누구나 친구를 좋아하게 될 수 있잖아요.

이성 간에든 동성 간에든 마찬가지로요.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점에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럽거나 비윤리적인 건 하나도 없어요.

 

“동성”의 상대를 좋아하게 됐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에요.

좋아하면 안 되는 상대를 좋아하는 게 아닌 걸요.

얼마든지 좋아해도 돼요.

 

동성에 대한 끌림이란

사회적으로 여전히 널리 인정받고 존중받지 못하는 끌림이지만

오히려 낙인찍히는 이유가 되는 끌림이지만

그렇게 되는 현실 자체가 문제인 걸요.

동성에 대한 끌림이 문제인 게 아니라요.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해도 괜찮고

표현하지 않고 혼자서만 간직해도 돼요.

표현을 한들 잘못이 아니고

표현을 안 한들 잘못이 아니어요.

 

어떤 경우에나 중요한 건

두 분이 룸메이트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서로에 대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예의와 배려랄까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과 더불어서요.

 

감정 표현을 안 하고

일단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는다고 하면

친구가 내 감정을 모른다는 점을

명확히 아는 상태에서

친구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할 거예요.

 

친구는 내 마음을 알지도 못하는 데

혼자 기대하고 

혼자 짐작하고

혼자 일희일비 하다보면

친구도 뭔가 이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걸 눈치챌 테니까요.

 

연애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친구 사이에

가능한 것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구분을

스스로 잘 하셔서 

그에 따라 처신을 하는 거예요.

 

친구에게 말하지 않고 지내는 것을

친구를 속이고 있다거나 배신하는 거라고

생각지는 마셨으면 해요.

 

314829 님이 

자기 감정을 친구에게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친구에게 해로운가 하면

그렇지 않은 걸요.

친구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이

친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겠어요.

 

끌림을 표현하는가 안 하는가는 

314829 님이 선택해서 결정할 수 있고 그래도 되는 문제예요.

본인 감정을 어떻게 다룰지의 문제지

상대방을 속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어요.

 

감정 표현을 한다고 가정하면

친구가 거기 보일 반응이 있겠죠.

 

고백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정말 멋진 전개일 텐데요, 그야말로)

생각해 보겠다 결정을 보류할 수도 있고

친구로는 소중하지만 연애 감정으로는 전혀 안 보인다고

거절할 수도 있을 거예요.

무슨 반응을 할 지 몰라요.

 

이때 314829 님은 

친구의 반응을 납득하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시면 돼요.

 

가령 

거절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서글프고 뼈아프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연애를 혼자 할 수는 없잖아요.

마음 없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연애하자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 물러나야죠.

 

감정 자체를 바로 정리할 수는 없더라도

314829 님 스스로는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감정을 다루더라도

최소한 두 분 관계에서 

그 감정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도록 해야 할 테니까요.

 

고백한 사람은 고백한 사람대로

고백받은 사람은 고백받은 사람대로

정성껏 노력하는 거예요.

 

전자는 후자에게 부담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후자는 전자에게 야속하게 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식으로요.

어떻게 노력하자는 약속까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다면 더 좋겠죠.

 

서로 아끼는 친구 사이라면

충분히 함께 노력할 수 있어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관계를 오히려 더 돈독히 다질 수도 있어요.

 

최악의 경우는 친구가 동성애/양성애 혐오적인 반응을 보이며

314829 님의 감정과 존재를 무시하고 비난하는 반응을 보이는 건데

평소에 동성애/양성애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며 

친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파악을 해 보시면 좋겠어요.

만일 친구가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게 예상이 된다면

아예 고백도 마시라고 권해드리고 싶고요.

 

이렇게 편견과 적대감에 가득찬 사람이라니

좋아하는 내 마음이 아깝다는 심정으로

(가슴이 물론 몹시 아프겠지만) 단칼에 

접어 버리시라는 말씀도 꼭 드리고 싶어요.

 

진짜요. 

그런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마셔요.

314829 님은 소중한 걸요.

314829 님의 마음은 예쁘고

314829 님의 감정과 열망은 

존중받아 마땅한 걸요.

 

어떻게 고백을 한들

무슨 말로 커밍아웃을 한들

최소한의 존중이 없으리란 판단이 들면

정말 그 친구는 그만 좋아하셨으면 해요.

314829 님 자신을 위해서요.

 

그리고

고백할 생각이 아직 없는데

혹은, 생각은 있지만 아직 용기를 못내고 있는데

울컥해서 아무렇게나 감정을 표현하게 될 상황이 걱정되면

그렇게 충동적으로 고백하게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자기만의 거름 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어요.

불쑥 마음이 벅찰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 장치를 가동시키는 거죠.

언제 그렇게 감정이 쏟아져 나오려 했는지 돌이켜 보며

마음 속으로 훈련 시뮬레이션도 해 보고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말을 막 해 버리려고 했음을 깨닫는 순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예를 들어 하나, 둘, 셋, 이렇게 세 단계로 

주문을 외어 보는 거예요.

 

각 단계별 주문은 314829 님이 

자기 마음에 잘 적용할 수 있는 내용으로

직접 채우고요.

 

가령, 다음과 같이요.

 

하나,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둘, 지금 말할 계획이 전혀 아니었다.

셋, 말을 해 버리는 것보다 나 스스로에게 좀 더 시간을 주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속으로 되뇌었는데도 

여전히 감정이 폭발할 거 같고 

눈물이 흘러 넘칠 거 같고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에

몸이 들썩이고 머리가 아프다면

한 번 더 차근차근 읊어 보셔요.

반복해서.

 

그래도 안 될 때를 대비해

다른 한 벌의 주문을 마련해 놓는 것도 좋겠어요.

 

하나, 참는 거 힘들지만 견딜 수 있다. (내가 못할 게 뭐냐.)

둘, 못 참아서 저지르고 난 뒤의 일을 감당하느라 애쓰는 것보다

참으며 힘든 게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낫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셋, 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고백과 커밍아웃은 충분히 준비하고 하자.

 

이것 또한 최소한 두 번 반복하는 거예요.

 

이렇게

두 벌의 주문을 되풀이해서 외며

그 안에 담긴 생각의 흐름을

거듭 따라가다보면

진정할 수 있을 거예요.

차츰 진정해 나가면서 냉정한 판단력을 되찾으면

준비 안 된 상황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일을

직접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내내 견디고 참기 보다는

룸메이트를 바꾸는 게 314829 님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룸메이트 바꾸기가 가능하다면 그 또한

늘 선택지에 포함시켜 두시고요.

 

상담원이 드린 말씀이

314829 님에게 잘 가닿을지 모르겠어요.

나중에라도 이곳을 다시 방문해 글을 읽게 되시면

조금이라도 격려받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어요.

 

친구에 대한 감정 보살펴 나가는 과정에서

혼자 감당하기 힘들 때면

언제라도 다시 이곳 게시판 찾아주세요.

 

이번에는 답변이 너무 늦었는데

다음에 새로 사연을 남겨 주시면

그때는 이렇게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않을게요.

 

신학기 건강하게 헤쳐 나가시기를 바라며

오늘 답변은 이만 맺습니다.

상담원이었어요.

 

2017020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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