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루네 님, 상담원이어요.
구월 하순에 글을 남기셨는데
이제 십일월도 중순을 지나고 있네요.
답변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많이 늦은 상담이지만
고민을 풀어나가시는 데 유용한 실마리를 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글을 이어 나갈게요.
동성 친구가 너무나 좋아져버려서
그 마음을 어째야 할지 고민이라 적으셨어요.
처음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이러다 지나가려나 싶었지만
새록새록 다시 설레고 신경이 쓰여서
이거 왜 이러나 싶고
혼란스러우시다고 하셨네요.
상담원은 무엇보다도 말이죠
좋은 만큼 좋아하셔도 된다는 말씀을
가장 먼저 드리고 싶어요.
그것도 아주 힘주어 드리고 싶어요.
여자인 친구한테 반해서
두근거리고 떨리고 애틋한 마음 되는 거
그거 괜찮은 거예요.
이상하지도 않고
나쁜 일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어요.
히루네 님한테 무슨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고요.
바꿔 놓아야만 하는 일도 아니고요.
상대방한테 미안할 일도
어디가서 부끄러워 할 일도
스스로 반성해야 할 일도 아니랍니다.
히루네 님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
하나도 빼고 더할 거 없이 그냥 그대로
고스란히 느끼시면 돼요.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그 자체로 소중하고
그 자체로 예쁜 마음이에요.
왜 설렐까
왜 신경이 쓰일까
질문하셨는데요.
왜 그렇게 됐는지를
꼭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설레는 마음, 신경쓰이는 마음
거기에만 집중해도 괜찮아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
드물지 않아요.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이유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거
이상하지 않아요.
좋아서 벅찬 마음을
수줍고 떨리는 마음을
말로 채 못 담고 마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은 걸요.
히루네 님은 아마
어떤 순간 그 친구의 반짝임을 봤겠죠.
그 반짝임에 심장이 철렁했을 테고요.
그런 순간이 자주 있었을 거예요.
그게 한 겹 두 겹 쌓이면서 마음이 깊어졌고요.
차근차근 돌이켜 보다보면
맞아 그때 그 순간! 이렇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을지도 몰라요.
기억나는대로
떠오르는대로
소중히 간직해 뒀다
생각날 때면 꺼내 보시면 돼요.
다만
그 순간이 언제였나를 막 일부러 추적하고
애써 이유를 캐고 그러지는 않아도 괜찮다는 거랍니다.
친구가 좋아서
음 이 마음 뭘까 지나가려나 했는데 계속 좋아서
마음 속이 내내 웅성인다는 거
그 사실만을 주목하셔도 돼요.
그리고
친구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히루네 님이 친구를 좋아해도 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실 필요 없어요.
물론 그 친구도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마음을 전해보기라도 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요.
그간 성정체성을 특별히 고민해 본 적 없는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바람에 새삼 탐색에 들어가게 되기도 하고
자길 좋다고 하는 고백을 듣고 거기에 설레게 되기도 하고
그럴 수 있어요.
그리고 친구가 레즈비언이라 한들 그게
히루네 님 감정을 친구가 받아주리라는 보장도 아닌걸요.
마음을 전했을 때 그 감정 자체를 이해 못해주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될 수 있다 해도 말이어요.
꼭 레즈비언과 레즈비언이 만나야만
연애가 이루어질 수 있고
감정을 품는 게 의미가 있고
그렇지 않답니다.
그러니 히루네 님 감정을 살피는 과정에서
그 친구가 레즈인지 아닌지 자체에
마음 졸이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당장 덥석 고백하기 어렵다면
우선 서서히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서 시작하면 어떨까요.
친하게 지내면서
친구가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나
마음을 전해 볼 길이 있을지 어떨지를
두루 살펴보는 거예요.
꼭 고백을 하거나 연애를 시작하게 되지는 않는다 해도
친해지는 과정 자체의 기쁨이 또 있지 않을까요.
원없이 좋아하셔도 돼요.
검열없이 그 감정을 통째로 누리셔도 돼요.
누군가가 좋아졌다는 거
저 사람이 지금 너무 좋다는 거
그거 진짜 근사한 경험이잖아요.
내 삶에 나를 이토록 설레게 하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그 사람과 내가 이루어질 것인가와 무관하게
일단 그 사실 만으로도 너무 멋지잖아요.
무수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을 뒤흔드는 존재를 만나다니
그 사람이 바로 가까이 있다니
정말이지 신기하잖아요.
사랑에 빠진 스스로를 예쁘게 봐 주세요.
떨려서 어쩔 바 모르는 자기 자신을 귀엽게 봐 주세요.
애타는 시절을 고이 여겨 주세요.
어떻게 다가가 볼 지
맘껏 좋아하는 가운데
찬찬히 궁리해 나가시고요.
그 과정에서
답답하고 궁금하고 그러면
언제라도 다시 이곳 게시판 찾아 오셔요.
히루네 님의 짝사랑을 응원하며
오늘 상담은 이만 마칩니다.
상담원이었습니다.
20161112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