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018 님, 답변을 드립니다.

 

익명018 님, 상담원입니다.

 

성정체성을 두고 오래 고민해 오신 바를 털어놓으며

거기에 새삼스럽게 찾아온 혼란을 호소하신 글, 

속속들이 살펴 거듭 읽어 보았어요.

익명018 님의 정체성 탐색 과정을 돕게 되어 반갑습니다.

상담소 찾아오시기를 참 잘 하셨어요.

 

스스로를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라고 생각하시기는 하지만

동성에게 끌리는 그간의 경험이 정말 진짜인지,

이렇게 진지하게 자아정체성에 통합해도 괜찮은지,

문득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애초에 어떤 충격에 의해 

착각으로 동성을 좋아한다고 믿게 된 건 아닌지,

불필요하게 과장해서 받아들인 건 아닌지,

만일 그랬던 거라면 어떻게 길을 다시 잡아 나아가야 할지,

고민이 몹시 깊으세요.

 

자기 생각을 자기가 못 미더워하게 되면서 

많이 힘드시겠구나 하고 

마음이 쓰여요.

 

자기 자신에 대해 영 불확실한 느낌이 벅찬 한편

양성애자나 동성애자로 확고히 정체화 하기도 부담되는 오도가도 못할 상황이 

무척 답답하시겠구나 하고

염려되고요.

 

상담원은 무엇보다도 익명018 님을 

안심부터 시켜드리고 싶어요.

 

실제로 어떤 계기를 통해 

동성인 여자에게 끌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든

그 끌림의 경험 자체를 느껴지는 강렬함의 정도 그대로

고스란히 긍정하셔도 괜찮다고 말이지요.

 

아, 나는 동성을 좋아하는구나,

아하, 나는 동성에게 매혹되는 사람이구나, 이러한 깨달음이 

본인의 착각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자기 인식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일반적인 기준이나 점검 사항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요.

 

양성애자 정체성이나 동성애자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특정한 경험의 목록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고요.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정석적인, 제대로 된 성정체성 탐색이고

그렇게 탐색된 정체성만이 진지한 정체성이라는 법도 없어요.

 

본인이 누구에게 반하는지 

누구한테 성적으로 끌리는지 등과 관련된 나름의 경험과 

그 경험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마음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는 작업,

바로 그 작업이 자기 정체성 탐색에 가장 중요하답니다.

 

익명018 님의 경우도

익명018 님이 자기 경험에 어떤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는지가

제일 중요한 셈이에요.

 

마침내 나는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이겠구나, 하고 결론내리시기까지

오랜 정보 수집과 고민의 과정을 거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상담원은 익명018 님이 본인이 거쳐온 그 과정을 

충분히 믿어주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자기가 자기 마음을 살피고 보살펴 온 과정과

거기서부터 길어 올린 나름의 결론을

의심없이 검열없이 긍정하셔도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야한 동영상을 통해 레즈비언 관계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어도 괜찮고요.

 

가까운 친구나 지나치는 사람 가운데 호감이 가는 동성을 발견하며

거기서부터 동성에 대한 끌림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대도 괜찮아요.

 

남성 일반에 워낙 실망이 크고 환상이 없어

상대적으로 여자 쪽에 더 관심을 두다보니

설렘이나 성적인 흥분 또한 여자에게 더 많이 느끼게 된 것 같다 

하더라도 괜찮고 말이지요.

 

처음부터 진지했을 수도 있지만

호기심과 환상으로 시작된 탐색이라도 괜찮아요.

줄곧 흔들림없이 확신해 왔을 수도 있지만

중간에 흔들리고 헷갈렸어도 괜찮고요.

 

거듭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결론이 의미있으려면 

시작이나 과정이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법이란

정말 정말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나아가

시작은 아주 사소하였으나

차츰 온 감각을 동원해 레즈비언 관계를 궁금해 하게 되었고

궁금증과 매혹이 너무 큰 나머지 점점 더 적극적으로 더 맹렬하게 

스스로를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로 몰아온 거라고 해도

역시 괜찮아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러난 감정부터가 강렬했든

직접, 일부러 그 감정을 계발해서 더욱 강화시켰든 다 괜찮아요.

여자로서 여자에게 끌리고 여자로서 여자와 섹스하길 원하는 욕망 자체가

있는 그대로, 가감없이, 어떠한 단서조건 없이도

실로 괜찮기 때문이랍니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나

본인이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임을 확신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

어느 하나도 수치스러워 하실 부분이 없어요.

부끄러워 하지 않으셔도 괜찮고

자책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우리는 모두

이성애만이 자연스럽고 정상이라는 규범이

여전히 견고한 가운데서 살아가기 때문에

동성에게 끌리는 경험을 하면서도 그걸 검열없이 긍정하기가

무척 어려워요.

 

사정이 그렇다보니 

자기 감정을 채 인정하지 못하고 외면해 버리거나

감정은 인정하되 최대한 사소하게 보려고 애쓰는 분들이 적지 않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익명018 님은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직면하고

그 감정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용감하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지금까지 해 오신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가시기를 당부드려요.

 

자기 마음을 살뜰히 돌보고

그렇게 자기 마음을 챙기는 자기 역량을 믿고

자기가 스스로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면 

다른 어떤 통념보다 존중하는 자신감을 가지시자고 권해드려요.

 

그리고 언제나

직관적으로 자기한테 맞는 길이다

직감적으로 이 길이 내 길이다 싶은 방향으로 가셔요.

끌리는 데는 더 잘 다가가기 위해 방법을 찾으시고요

별로 안 끌리는 쪽으로는 굳이 애써서 가지 마셔요.

 

자기한테 자연스러운 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일부러 검열하지 마시고요.

남들은 자연스럽게 느끼는 걸 나는 그렇게 못 느낀다고 자기를 탓하지도 마시고요.

여자가 좋으면 좋은 만큼 자기 마음을 그리로 흐르게 하고

남자한테 별로 관심이 없으면 없는대로 그 상태 자체를 받아들이셔도 괜찮으니까요.

 

상담글이 

익명018 님이 자기 마음을 탐험하는 데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 드렸으면 합니다.

 

혹여라도

부모님이나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정체성을 두고 갈등이 빚어지거나

앞으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 교제 관계를 모색하게 되는 과정 등에서

또 나누고 싶은 고민이 생기면

언제라도 다시 상담소를 찾아 털어놓아 주세요.

 

막막함을 버티고 궁지를 돌파하는 작업을

정성껏 같이 해 드릴게요.

 

그럼 익명018 님의 자기 탐구를 응원하며

오늘은 이만 답변을 맺어요.

 

상담원이었습니다.

 

20160220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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