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소입니다.

C님 상담소입니다.

지연된 상담 때문에 맘이 상하시진 않으셨을지 걱정이 됩니다.

쉽게 털어 놓기 어려운 문제이니 만큼
상담소를 찾아오시기까지 많이 힘드셨을텐데,
힘든 마음의 무게를 얼른 덜지 못하고
오히려 더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돼요.

정말 죄송합니다.

올려주신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본인의 정체성을 설명해보고자 하는
여러 경험들을 적어 주셨지요?

C님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많은 분들이 상담소로 찾아 오세요.
그래서 이런 고민이 하찮다는 것이 절대 아니라,
이런 고민을 하는 게 내가 이상해서라든가,
나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든가 하는 걱정으로
걱정에 걱정을 더하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힘든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원인 찾기"입니다.

C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 탐색 과정을을
특별히 혼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상담원이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C님께서는 부단히 자신의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자신을 추궁하고 있는,
혼란 상황이 맞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저는 지금의 이 혼란이 절대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C님께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조금만 다른 방법을 찾으신다면
지금까지 문제였던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일말의 의심없이 태어나서부터 주욱 가져왔던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내 자신이 "왜 이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살아가게 됐는지"
의구심을 갖거나 "내가 이성애자면 어쩌지?"라고 불안해 하거나,
"저 사람은 아무래도 이성애자인 것 같아"라고 짐작해 보거나
이런 생각들을 하진 않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심지어 자기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이름 붙이는 것 자체를
어색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가 싶은데요.

언제나 "기준"이었고, 언제나 "정상"이라고 믿어지는.
이 재미있는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은
항상 그것과 다른 정체성을 갖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답이 없는 질문을 쏟아 붓지요.

"너는 어쩌다 동성애자가 된거냐"
"너는 우리와 뭐가 다르기에 동성애자 된거냐"
"니가 동성애자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냐"
"니가 동성애자라는 걸 증명해 봐라"
"이성과의 교제 경험이나 성관계를 경험해 본적은 있냐"
"어째서 그런 성향을 포기하려 하지 않으냐"

방식과 말투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대부분 묻고 싶은 확인하고 싶은 전제는 단 하나입니다.

이성애가 정상이요, 이성애가 진리요, 자연의 섭리인데.
"도대체 왜?"

제가 C님이 펼쳐 보여주신 고민과는 별개로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는지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C님이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물음이
위에 나열한 저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들의 전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정체성이라는 고민을 다룰 때 스스로에게 비슷하게 질문합니다.

그 폭주하는 질문을 잠시 잠시만, 멈추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정체성 고민은 원인을 탐색하거나 해결의 조치를 구하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이 발견한 나의 감정, 모습, 경험에 소중한 의미부여와 색다른 해석을 통해
앞으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어떤 모습이건, 내가 누구와 함께 하고 싶건,
나를 뭐라고 이름 붙이건 상관없이
나의 감정과 나의 경험들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가치가 충분하니까요.

그러니 앞으로는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
괄호로 생략되어 있어 잘 보이지 않는 그 전제
"아닐거야 그렇지?"라는 그 전제를 잠시 치우시고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왜 아니어야 하지? 나는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나"로
방향을 바꿔 질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래서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그 다음에 다시 하신다면 좀 더 쉽게 이 문제를 다루게 되실 거라고 생각해요.

이 질문의 답이 어떤 식으로 결론지어지건,
그것은 C님의 선택에 달려있고 또 그 선택은 지지받아야 하는
의미있는 것일 테니까요.

한 편으로 제가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C님의 정체성에 어떤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별로 맘에도 없는 애를 친구들 앞에서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정말로 그 남자아이가 좋아졌다는 경험,

남자한테 강제로 모텔로 끌려갈 뻔 했던 경험,

여자친구와의 스킨십에서 느껴지는 안정감,

남자아이에게 끌렸던 마음 하나만으로
C님의 정체성을 이성애자라 단정짓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은 기혼 여성들도 평생을 이성애자라고 생각하다
갑작스레 만난 동성 연인에게 인생을 걸기도 하고,
레즈비언으로 정체화 한 여성들이 의도치 않게 시작된 남성과의
연애나 결혼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남성으로부터 폭력적인 공격을 받은 경험,
그 트라우마 때문에 동성에게 느끼게 된 안정감 하나로
C님의 정체성을 무엇이라 단정 짓기도 쉽지 않습니다.

일단 이성관계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에 동성에게 끌리는 것이라는
생각에 모순이 있습니다.

이성애자 남성이 남성으로부터 겪은 폭력피해 때문에
여성을 좋아하거나,
이성애자 여성이 여성으로부터 겪은 폭력피해 때문에
남성을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닌 것 처럼,
동성애자들의 정체성이 이성으로부터 겪은 폭력 피해 때문에
규정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무리한 "원인찾기"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밖에요.

또 워낙에 여성에게 폭력적인 사건사고들이 많이 벌어지는
(오래된)요즘의 사회 현실을 볼 때
폭력피해 경험을 한 모든 여성들이 다 이성을 혐오하면서
동성관계에서의 안정감만으로 살아가길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모두가 남성혐오를 갖는다거나
무조건적으로 여성들이 있는 공간을 편해 하는 것도 아니고요.

또 한편으로는 혹여 남성혐오와 같은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동성애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안고 있는 심리적 상흔 때문에
혹은 그 심리적 상흔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 배우자를 찾고 또 그 관계에서 자신의 아픔을 견뎌낼
안정감과 힘을 얻는다고 해서
그 관계가 거짓이 된다거나 그 사람의 정체성이 의심을 사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트라우마와 관련해 발생하는 삶의 갈등은
또 다른 사건과 관계들 속에서 지지받으면서
안전하게 재해석 되고 재구성 되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요.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감정과 경험,
스스로의 감정과 경험을 마주할 용기,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겠지요.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자신이 앞으로 만나게 될 상대를 상상하면서
성행위만을 생각한다거나 맘에도 없이 성별만으로 집착한다거나
하지는 않지요.

저는 교제경험 여부나 성관계경험 여부가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에 중요한 부분이 될 수는 있지만,
전부가 될 수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성애자의 삶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삶 전반에 비춰 실현되고 의미를 부여 받는 것 처럼
동성애자의 삶 역시 어느 하나만으로
예를 들어 데이트해보고 싶다, 키스해보고 싶다만으로
설명되거나 증명될 수는 없습니다.

그게 작은 시작이 될 수는 있겠지만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다시 정리한다면,
님께서 얻고자 하셨던 질문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나는 양성애자인가, 이성애자인가, 동성애자인가"라는 질문에
상담원은 답을 내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C님께서 직접 내리실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전문가(라고 자청하는 사람들도)도
동성애자를 분별해 낼 수도, 증명해 낼 수도 없습니다.
내 감정에 대한 명명이나 나 자신에 대한 설명은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여성과 만나서 여성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중이라고 해도,
본인이 스스로를 동성애자라고 이름 붙이길 꺼려하다면,
굳이 그 이름을 강제해야한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름 붙이기는 조금 천천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아직까지 어느 쪽이건 조금 불안하고 불편하다면 천천히하셔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나의 경험들에 대한 좀 더 긍정적인 평가들과 함께
내 안에 존재하는 여러 모습들에 주목해 보시면 어떨까요?

중요한 건 이 고민을 통해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좀 더 내게 솔직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
나를 부정하고 숨지려는 것이 아니니까요.

현재의 질문의 방식과 내용을 조금 바꿔보시라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상담글이었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면서
이번 상담을 이쯤에서 마무리해볼까합니다.

초봄날씨와 한겨울날씨가 왔다갔다하면서
손도 맘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는데
부디 감기 조심하시고 또 마음도 단디 잡수셔서
진행하시던 고민에 박차를 가하시기를 응원해 봅니다.

상담소였습니다.

100504007 

 


 

 

 

 

 

 

 

 

 

 

 

 

 

 
  


상담소 1

댓글 1개

C님의 코멘트

C
항상 가지던 의문이었던지라 급한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상담원분들의 사정에 따라 답변은 길게 2주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구요. 따뜻한 걱정 감사합니다.
상담원분의 글을 읽으면서 제 스스로가 저를 추궁했다는 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 사람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매우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