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맞이 상담소 편지: “차별과 혐오에 지지 마요. 나를 돌보고 옆을 챙겨요.”

2015 IDAHOT: 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and Transphobia

 

5월 17일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맞이 편지.

“차별과 혐오에 지지 마요. 나를 돌보고 옆을 챙겨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성소수자 여러분, <한국레즈비언상담소>입니다. 

 

이 사회는 아주 더디게나마 조금씩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으로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성소수자 단체들이 새로 생기고 있고, 성소수자 권리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과 집단도 늘어나고 있으며, 성소수자 권리 증진에 기여할 유의미한 판결들이 속속 나와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리를 주장하는 성소수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존재가 가시화됨에 따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차별, 폭력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반동성애-보수개신교 혐오 세력은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한 대중 행사마다 쫓아다니며 방해하고, 정치인들은 이들의 압력에 너무도 쉽게 굴복합니다. 가족, 교육, 노동, 병역 제도 등은 여전히 이성애라는 관계의 형태와 비트랜스젠더 중심의 성별 규범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쉽사리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 관계 속에, 교육 현장에, 일터에, 그리고 지역 사회에 성소수자를 숨죽이게 하는 분위기가 만연합니다. 아직도 참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라면 소름끼쳐하고 트랜스젠더라면 우스꽝스러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성소수자 혐오적 현실에 <상담소>는 분노합니다.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성별표현을 매개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하루속히 제정하라고, 

성소수자의 교육권, 노동권, 의료접근권, 가족구성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를 마련하라고,

성소수자 인권침해적 법률이나 지침을 폐기하라고,

각급 정부 부처와 정치인들에게 요구합니다.

 

이와 더불어 <상담소>는 성소수자 혐오적 현실을 어떻게든 살아내는 중인 성소수자 여러분과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이 글을 띄웁니다. 우리를 향한 혐오에 지지 않고 살아보자고 힘주어 말하기 위해 전하는 글입니다.

 

지금도 많은 분이 동성에게 끌리는 자기 자신,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별로 살 수 없는 자기 자신, 성역할 규범을 ‘제대로’ 수행하는 게 불가능한 자기 자신을 탓하고 수치스러워합니다. 왜 나는 남들 같지 못한가, 어째서 평범하게 태어나지 못했는가 자문하며 서글퍼 합니다. 저주받은 몸이라는 생각에 절망합니다. 평생 누구도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삶의 의지를 잃습니다. 

 

<상담소>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이런 사연을 끊임없이 접해 왔습니다. 

 

번번이 참담한 심정이 됩니다.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자괴감에 빠져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름을 문제로 인식하는 성소수자 혐오자들 말입니다. 참담한 심정과 더불어 막막함 또한 느낍니다. 이성애 아닌 형태의 끌림과 욕망과 관계에 대한 혐오가 참으로 뿌리 깊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성별 규범에 어긋나는 몸과 존재에 대한 공포가 참으로 지독하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사회적인 혐오와 공포가 얼마나 강고하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과 성별표현을 사회가 가르치는 방식과는 다르게 탐색하는 당사자들의 마음속까지도 마구 침투해 버리는 것일까요. 무섭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의심하게 하고, 우리 스스로를 비난하게 하는 그런 혐오와 공포에 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성의 친구에게 두근거리는 자신을 책망하기보다, 그런 두근거림을 멸시하는 동성애 혐오에 분노하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됩니다. 이성에게도 동성에게도 반해버리고는 하는 스스로를 이상하게 여기며 괴로워하지 말고, 어느 한쪽으로 정하라고 강요하고 이성애자가 되지 않을 경우 치료받으라고 몰아붙이는 양성애 혐오를 부당하다고 믿으면 좋겠습니다. 태어나서 부여받은 성별이 내가 인식하는 나의 성별이 아닐 때 그런 나 자신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애초에 나의 뜻과는 아무 상관 없이 나를 특정 성별로 규정하고 가둬버린 신분등록제도와 의료관행을 근본적으로 불만스러워 하면 좋겠습니다. 여자인데 여자답지 않고 남자인데 남자 같을 수 없는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보기보다 여성-남성, 여성성-남성성의 고정된 이분법 자체를 문제 삼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부끄러워하기보다 나더러 부끄러우라고 요구하는 사회에 맞서기.

나를 고장 난 존재로 보기보다 나를 고장 났다고 하는 사회가 고장이라고 지적하기.

나의 삶을 비극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나를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 

나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비극이라고 생각하기.

 

서럽고 힘들 때면 이렇게 마음 추스르고 다시 오늘 하루를 살 힘을 얻었으면 합니다.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젠더퀴어, 그리고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혹은 이름 붙여지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퀴어와 성소수자 여러분. 본인의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탐색 중인 모든 여러분. 우리에게는 혐오 받지 않을 마땅한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 그대로, 스스로 규정하는 자기 정체성 그대로 살아가며 차별당하지 않을 마땅한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혐오와 차별이 아닌, 긍정과 지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검열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레 움츠러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성소수자니까 다른 거라도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자기한테 가장 편안한 몸 상태로, 자기한테 가장 잘 맞는다 싶은 모습으로, 자기가 직접 규정한 정체성으로, 자기만의 보조대로 살아가도 됩니다. 그래도 됩니다. 그래도 된다는 믿음을 서로 주고 받으며 그렇게 함께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가고, 혐오와 차별에 문제제기하고, 공동체 문화를 바꾸고, 법제도의 변화를 만들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한 명 한 명 소중하고 근사합니다.

잊지 말기로 해요.

 

2015년 5월 17일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