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소수자 정치 토론회 ::
주최_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준)
일시_ 2005년 12월 29일(목) 저녁 7시 30분
작성_ 케이
1. 들어가며
최근 성소수자위원회의 홈페이지를 방문했다가 민주노동당 내의 부문할당 관련하여 성소수자위원회 준비위원회 위원장 님이 밝히신 사퇴의 변을 읽게 되었습니다. 위원회가 자리한 곳은 분명 소위 진보 정당이라는 곳이지요. 헌데 그 내부에서조차 큰 어려움에 누차 부딪치는 것을 보면 성소수자 운동은 어디서나 결코 쉽지 않은 운동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늘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는 그 현실이야말로, 그러한 현실에 처해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게 해 주는 토양이기도 하다는 점을 새삼 생각해 봅니다. 저들에게는 골칫거리마냥 여겨질 문제제기일 뿐이겠지만 결국은 그것이 잘못된 것들을 조금씩 바꾸어 나갈 원동력이 되리라 믿고 싶네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계실 성소수자위원회 여러분들께 격려를 보내드리면서 발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2. 동성애자와 진보 정치
이 두 가지 낱말이 오늘 토론회의 주제이죠. 솔직히 좀 낯설다고 해야겠습니다. 진보 정치고 보수 정치고 뭐고, 동성애자가 정치의 장 안에서 동성애자의 정체성을 내걸고 움직여 본 역사가 한국 사회에는 아직까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렇게만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당연하죠. 왜냐하면, 동성애자의, 동성애자에 의한, 동성애자를 위한 정치는 동성애자 권리 운동과 함께 계속돼 왔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그룹을 만들고, 왜곡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를 알려내고, 무수한 차별의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성애주의에 문제제기 해 왔던 모든 활동들이 바로 동성애자들의 정치였습니다. 동성애자들은 그러한 활동을 통해 기존 정치의 제한된 영역 자체에 문제제기 해 왔다고도 할 수 있지요. 동성애자를 소외시키는 정치의 영역 바깥에 우리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공간을 끊임없이 만들어 오면서 말입니다. 앞으로 이러한 방식의 정치는 필히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갈 길이 멉니다. 그러므로 정치의 의미를 지극히 좁게만 한정하지 않는 이상, 동성애자들이 지금까지 정치참여를 거의 하지 않았다거나 못했다는 식의 논의를 하는 것은 다소 핀트가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제안서에 담겨있는 ‘현 시기 동성애자 진영의 정치 참여 필요성’ 이란 방식의 표현에서 저는 성소수자위원회가 상당히 좁은 의미의 정치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동성애자 진영은 십여 년간의 권리 운동을 통해 새로운 정치의 장을 만들어 오고 있는데 이제 와서 ‘정치 참여’ 라니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와 국회와 정당의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갔고, 저는 의아한 기분이 됐습니다. 왠지 당장 직접 선거라도 뛰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동성애자 진영의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 란 표현을 보면, 성소수자위원회가 생각하는 ‘정치’의 상이 그다지 협소한 의미의 정치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더 혼란스러워졌죠. 동성애자 진영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데 쓰이는 ‘정치’란 낱말의 뉘앙스와 동성애자 진영은 어떻게 정치세력화 할 것인가 하는데 쓰이는 ‘정치’란 낱말의 뉘앙스는 사뭇 다른 것이니 말입니다. 정치세력화라는 말 자체가 억압받는 자들의 역량을 결집시킨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여기서의 ‘정치’는 분명 협의의 정치를 뛰어 넘는 차원의 의미를 지닐 터이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더. ‘정치세력화’라는 말 자체가 동성애자들의 현실과 동성애자들이 벌여나가는 운동의 방식에 걸맞는 구호일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의문이 제게는 있습니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여성 정치세력화’ 라는 슬로건들이 있었다 해서, 그 틀을 고스란히 빌리는 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유효한 방식이 될 것인가 하는 겁니다. 동성애자들이 성정체성을 매개로 하여 처할 수밖에 없는 난처한 현실은 노동자민중이나 여성들과는 또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동자민중들도 단일하지 않고 여성들도 단일하지 않고 노동자민중과 여성 역시 결코 같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자들도 정치세력화라는 슬로건을 갖는데 별 무리가 없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인 노동자가 있을 수 있고 여성동성애자가 있을 수 있어 이들이 각각 노동자로서 투쟁하며 정치세력화 할 수 있고 여성으로서 투쟁하며 정치세력화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동성애자로서 정치세력화 할 수는 없습니다.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드러낼 수 없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정치세력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익명의 다수에게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동성애자 권리 운동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 역시 어떤 의미에서의 ‘정치세력화’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데 우리가 가져야 할 전략의 이름은 ‘정치세력화’가 아닌 다른 이름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운동들이 썼던 전략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제가 더 아리송해진 것은 ‘진보 정치’ 라는 말에 이르러서입니다. 제가 앞서, 동성애자들이 꾸준한 권리 운동을 통해 새로운 정치의 영역을 일구어 올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운동’과 ‘정치’가 같다고 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운동가’ 혹은 ‘활동가’ 와 ‘정치가’ 가 얼마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가만 생각해 봐도 ‘운동’과 ‘정치’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진보 정치’ 란 건, 대중 운동의 강력한 흐름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데요, 그래서 저는 ‘진보 정치=민주노동당’ 으로 만들어지는 등식에 다소 무리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민주노동당이 건설된 역사적 배경과 현 시기 민주노동당이 해 내고 있는 소수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모르고 있는 바가 아니나, 진보 정치의 모든 것이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다거나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3. 민주노동당과 단체들의 관계
네, 그럼 민주노동당과 성소수자 단체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민주노동당의 성소수자위원회와 성소수자 단체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당은 수렴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정당이 모든 것을 다 끌어안을 수 없습니다. 단체들은 저마다 입장이 다릅니다. 그걸 하나로 모아내려다 보면, 각 단체의 구체적인 개별적 필요가 사장될 위험이 있고, 결국 핵심을 찌르지 못하는 두루 뭉실한 안만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당도 나름의 입장이 있는 공간이지요. 이는 위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위원회 나름의 입장을 취할 수 있어야 하고 위원회 나름의 전략을 채택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더욱, 당은 단체들의 여러 목소리를 다 담아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수렴하는 역할을 하고자 할 때, 그 당은 단체들의 눈높이를 훌쩍 뛰어 넘는 높은 곳에서 단체들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당은 단체들을 선도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나름의 입장을 갖고 단체들과 소통하되 당의 흐름에 단체들을 맞춰 끌고 가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각 단체들이 현장에서 벌여내고 있는 활동의 속도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단적으로 말해서, 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라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세력화는 대중단위의 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미 정치세력화된 이익집단인 정당을 수단으로 소수자들이 정치세력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 과정 속에서 소수자들이 다시금 객체로 전락할 위험을 간과하는 처사입니다. 단체는 단지 당의 활동과 당의 입장을, 필요할 때 선택적으로 지지할 뿐입니다. 민주노동당에 성소수자위원회가 있다고 해서 모든 동성애자들이 민주노동당의 모든 활동을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동성애자들 중에도 정당 운동을 거부하는 노선을 택해 활동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저마다 정치적인 입장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이 아무리 내부에 유일하게 성소수자위원회를 갖추고 있는 당이라고 해도,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성소수자 단체들이 민주노동당에만 의지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제안서에서는 ‘정치참여 및 민주노동당 지지에 대해 보류적 입장’이라는 구절이 눈에 띄는데요, ‘보류적 입장’이라는 말 속에는 마치 ‘진보 정치를 위해서는 민주노동당을 반드시 지지해야 하는데 그 지지를 보류하고 있는 단체들을 보면 정치의식이 덜 함양된 것이 아닌가’ 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앞서 제가 이미 언급한 이유들에서 알 수 있듯, 민주노동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단체들이 정치의식이 부족하다거나 소극적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가 단체들의 정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겠죠.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와 단체들과의 관계를 논하고자 할 때도 몇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성소수자위원회는 단체의 성격을 띨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네요. 정당은 기본적으로 이익집단이고, 국가 체제 안에서 세력을 갖고자 움직이는 곳이지요. 아무리 민중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해도, 분명 ‘정당’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원내에 진출해있는 상태라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시민사회단체와 확실히 구분됩니다. NPO, NGO로서, 국가에 대항해 싸우거나 때때로 국가와 협상해 나가면서 활동해야 하는 여러 단체들과는 결코 같은 정체성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렇기에 위원회와 단체들은 동등한 입장에서 연대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민주노동당이 현실적으로 경계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측면을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포지션 설정의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민주노동당이나 성소수자위원회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은 잠재적인 연대 단체가 아니라 그저 단체들이 국가에 접근하는 통로로써 단체들에게 의미가 있는 공간일 터이지요. 이러한 주제-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 등등-로 토론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민주노동당이 다른 단체들과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는 당내의 기구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한 채로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액션들, 만들어낼 수 있는 담론들을 고민해야 합니다. 한국의 동성애자 권리 운동 단체들은 길게는 11여 년간 활동해 오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성소수자위원회는 신생 조직에 가깝습니다. 자기 역량을 갖출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이 때, 당 조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체들이 해왔던 활동들의 성과를 전부 포괄해 내어 당장 당 활동으로 반영할 수 있을 것처럼 이해해서도 안 될 것이고, 단체들이 해 왔던 것들과 전혀 무관한 방식의, 한국 지형과 동떨어진 흐름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4. 나가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두루 들어보고 싶습니다. 여러 시각들이 교환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단일하게 합쳐지는 입장이 아니라 갈라지는 입장들이야말로 운동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자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