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포 극복하기

:: 서울대학교 여성주의 자치언론 <쥬이쌍스> ::

_ 2005년 11월 4일
_ 케이

공포란 필시 극복돼야 할 것이다. 감정을 좀먹고 몸을 사리게 만드는 인간 최대의 적. 일상적인 활동의 종류와 범위를 제한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 이런 설명을 붙여 봐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공포다. 공포는 공포의 구체적인 대상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위협한다. 생명에 위협이 되는 어떤 물리적인 타격을 받지 않았는데 그저 공포 그 자체에 짓눌린 것만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그랬다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꼭 이런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일일이 상기할 필요도 없다. 공포에 장악을 당한 채 꼼짝도 못할 정도로 굳어버렸던 저마다의 경험만 돌이켜 보더라도 공포가 사람 잡는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 잡는 공포를 대체 어찌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가 된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도, 스멀스멀 일어나는 공포심도 쉽사리 제거되는 것이 아니기에, 내 안에 똬리를 틀고 들어앉은 그 공포를 얼마만큼 잘 다룰 수 있느냐가 나의 건강과 불건강을 좌우하는 열쇠가 된다. 아무래도 뭔가에 시달리는 기분으로는 즐겁고 유쾌한 컨디션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하물며 나를 괴롭히는 것이 공포심이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 갖은 감정을 조절하는데 익숙해지고 내 상태를 스스로 다스리는 데 어려움을 덜 느낄 수 있다면 분명히 살아가는 일이 조금은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잘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내 안의 공포를 다루는 문제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늘 여러 가지 공포에 휘둘리며 지내는 사람이고 그 때문에 내 자신이 대단히 황폐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하도 시달리다보니 어떻게 하면 좀 덜 시달릴 수 있을까 언제나 이리저리 궁리해보지만 남들 상담은 썩 잘 해주다가도 정작 내가 괴로운 건 잘 못 다루기 일쑤다. 심각한 정도의 두려움을 토로하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읽고 실컷 고심한 끝에 이렇게 저렇게 해 보시라고 권해 놓고 나서, 내가 정작 그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상기된 내 경험에 어쩔 줄 모른 채 질척질척한 느낌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이고 말이다. 그럴 때면 이거 원, 내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내 문제도 스스로 소화해 내지 못하는 상담원이라니, 자격미달. 이런 생각마저 들어버린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떻게든 그것들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음에 곁들일 최소한의 방법만 스스로 마련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공포와 고통을 다룰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기억해 두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의 잠재된 힘을 믿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직접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길어 올리는 것이다.

이 때 자칫하다가는 정답을 바라기 쉽다. 이미 제시되어 있는 정설 같은 방법 뭐 없나, 궁금하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원하는 방식 그리고 자기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방식을 고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참고하는 정도로 남들의 방식을 취한다면 그건 문제될 것도 없고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되겠지만 자기 스타일과 안 맞는 방식들을 억지로 취해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망각이, 누군가에게는 회피가, 누군가에게는 우회로를 선택하는 것이, 또 누군가에게는 정면돌파를 결의하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제에 직면’ 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들 하지만 ‘직면’ 이란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공포를 공포로 인지하는 과정에 이미 수반되는 것이다.

가령, 자신이 느끼는 공포나 고통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건 회피하는 방식처럼 보일 수 있을는지 몰라도, 이미 ‘직면’ 한 이후의 선택이다. 성폭력 피해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플래시백(1>)이 있을 때마다 이를 악문 채 그 장면들을 제쳐놓고 또 제쳐놓는다. 이들은 플래시백으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려 하거나 사건 속에서의 자기 경험을 구체적으로 되살리는 것을 통해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려 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떠올리지 않기 위해, 잊기 위해 플래시백을 망각한다. 플래시백을 망각하고, 그 플래시백의 기원이 된 사건을 망각한다. 완전한 삭제가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게 문제될 건 없지 않은가. 이런 노력 속에는 무섭고 끔찍한 순간을 최소화하고 싶은 바람이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의도적인 망각은, 누군가에게는 성폭력 피해 경험을 치유하는 과정의 한 지점에 놓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종점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피해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 남는다. 매일 같이 ‘그 때 그 미친 새끼가…’ 로 시작하는 말을 와글와글 쏟아내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통해 차츰 치유되어 가는 사람, 곰삭을 때까지 홀로 곱씹고 곱씹는 과정을 통해 그 때의 그 사건이 점점 덜 무섭게 오히려 익숙하게 떠오르는 변화를 느끼며 치유되어 가는 사람, 오랜 시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 오던 경험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경험을 하고 그 순간 놀랍게도 문득 다 괜찮아지는 느낌이 들어 당장 치유되어 버리는 사람, 아프고 힘든 게 분명한데도 수년간을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니야, 절대 별일 아니야’ 하고 주문을 외다시피 하여 정말로 ‘별일 아닌 일’처럼 되어버리는 것을 통해 치유되는 사람, 등 피해자들은 그 수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피해 경험을 소화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여기에 유일한 정답이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치유할 수 있으면 된다. 그렇게 살아 남아 다시금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면 된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예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난 이 글을 다소 무겁고 뿌리깊은 공포를 염두에 두고서 쓰기 시작했다. 망각이냐 회피냐, 우회로냐 곧은 도로냐 하는 식의 얘기도 내가 신경의 뿌리를 휘감고 있는 종류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할 수 있는 말인 것이다. 여름철 납량물 뉘앙스의 공포와는 그러므로 약간 차원이 다르다 할 수 있겠다.

그럼 구체적인 예를 하나 더 들며 이야기를 해 나가 보도록 하자.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 들어오는 내담 건수 중 절반이 족히 넘는 비율의 내담이 자신의 성 정체성 고민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들은, ‘정말 큰일이 났다’ 면서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고 털어놓는다. 사람마다 처해 있는 상황도 다르고 고민이 시작된 계기도 천차만별이지만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 레즈비언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다. 내가 동성애자이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정말 큰일인데.

동성애를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는 변태적인 성행위로만 보는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마 대부분 이 내담자들이 토로하는 것과 비슷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동성애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속속들이 깨칠 기회를 충분히 갖고 있는 편인 활동가들조차 이따금씩 헷갈리고 괴로운 마당이니까. 그러할 때 이런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나눠 보지 못한 내담자들이 느낄 두려움이 오죽할까. ‘나(와 우리들) 좀 비정상인 게 맞는 것 아닐까’, ‘이러고 사는 거, 웃기는 거지 뭐. 남들처럼 못살고, 이게 뭐란 말이야’, ‘돌연변이같이 태어났으니 불행한 게 당연해’, 하는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갈 때마다 난 명치 어디께 즈음에 뜨거운 멍울 같은 게 턱 걸려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부끄러움에 목덜미부터 붉히고 만다. 그런 생각들이 정말로 들어 한없이 절망적인 기분이 되고, 그런 생각 따위에 새삼 절망하는 내 자신에 분노가 치밀어 더 절망하게 된다.

힘들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탐색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내담자들에게 상담소의 상담원들이 해 주는 말은 이런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성 정체성이란 건 하루빨리 결정 내려야 하는 게 아니랍니다. 자신의 감정과 경험이 자신의 마음에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기울여요. 고민을 할 때는 자기에게 적절한 속도를 유지하세요. 그리고 마음이 흘러가는 방향을 찬찬히 살펴보세요. 그걸 고스란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 보고요. 어떤 판단을 내리든,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건 온전히 당신의 몫입니다. 다만 다음의 이야기들만은 꼭 기억해 주시면 좋겠어요. 동성의 상대에 대한 이끌림은 절대로 잘못 되었거나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동성인 누군가에게 두근거린다 해서, 동성인 누군가에게 에로틱한 감정을 느꼈다 해서,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는 점 말이에요. 난 괴물이 아닐까, 하고 수치스러워 하거나 그런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할 필요 없다는 점 말이에요. 이렇게 상담을 하면서 드는 마음은, 이 내담자들이 모두 동성의 상대에게 느꼈던 감정들 혹은 동성의 상대와의 교제들 같은 것들을 아주 천천히 나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담소의 상담이 그런 과정을 가능케 하는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사람마다 정말 다른 길을 갈 것이라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일 수 있다는 것, 또는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일단 받아들인 상태에서 그 이후의 고민들을 해 나간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문제의 답을 스스로 내 놓는다. 하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변태’ 로 살아가야 할 미래가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지고 못 견딜 만큼 두려워서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완벽한 이성애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고립감과 수치심 그리고 혐오감이 이들로 하여금 이런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거야말로 호모포비아(homophobia동성애공포증/혐오증)에 의한 희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동성애에 대한 만들어진 공포와 혐오가 이 사람들을 스스로 죄인 취급하게 만든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 호모포비아의 영향만 받지 않을 수 있었더라면 이들은 좀 다른 선택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동성애자로서의 가능성을 받아들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이기는 하나 이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고 아니 볼 수 없다. 이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의 뼈아픈 현실적 조건을 무의식 중에건 의식 중에건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자신들이 두려움에 떨게 될 상황이 발생할 것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한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들의 이러한 선택을 백번 이해한다. 레즈비언 활동가란 사람이 그래도 되느냐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을 백번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슬픈 현실 인식을 담고 있는지 한번만 더 생각해 본다면 반문할 말이 삼켜지지 않을까.

서두를 꺼낼 때까지만 해도, 소소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개인적인 두려움들 몇 가지에 대해 나름의 극복 방식이라도 제안할 것처럼 굴었다가 이내 골치 아픈 줄글들을 이어놓고 말았다. 그래도 어쩔까. 공포, 란 걸 떠올렸을 때 내 뇌리를 친 굵직한 것들, 언제고 나를 떠나질 않는 이 굵직한 것들, 이야말로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인 것을. 여기 미처 담지 못한 자그맣고 얇은 무섬증들에 대해서는 이 참에 그냥 내 노트에나 적어 두어야겠다. 지면을 주신 쥬이쌍스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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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해 당시의 상황이 기억 속에서 재현되면서 그 당시의 느낌까지도 고스란히 도로 느끼곤 하는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