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성장하는 레즈비언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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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05년 11월 07일
_ 공지훤

3년 전 겨울, 좋아하는 친구 때문에 방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울면서 ‘나는 레즈비언이구나’ 했다. 그렇게 정체화하면서, 줄곧 건드리지 않았었던 지난 경험들을 정성껏 재구성할 수 있었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에 존재감을 갖게 되고 설레어 하며 묘한 쾌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한편, ‘숙명적인 우울을 안고 살아가겠구나’ 하고 어두워져 갔다.

나는 끼리끼리(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전신, 이하 ‘상담소’)에 가입하러 간 것이 처음 나 아닌 다른 레즈비언을 보았던 경험이었다. 가입하러 가는 길에 나는 가죽점퍼에 체인을 둘렀거나 영화 <나홀로 집에2>에 나오는 ‘비둘기 아줌마’를 떠올렸더랬다. 다행히(?) 너무도 평범한 외모의 활동가를 보고 안심했었다. 설렘 이면에 불안과 혐오로 우울함이 짙었던 시기였다.

지금은 내가 상담소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상담소에선 정회원이 될 절차로 3차례에 걸쳐 세미나를 받아야 하는데, 1차 세미나는 레즈비언으로 살아온 ‘나의 인생곡선’을 그리고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엔 다양한 경험과 반응들이 있다. 무표정으로 몇 마디만 하고 마는 사람, 시종 울먹이는 사람, 아직도 혼란스럽다고 털어놓는 사람, 자신을 혐오스러워했던 친구 얘기를 하며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 할 말이 없다고 사람들 눈치를 보며 미안해하는 사람 등.

상담소 활동을 하면서 신입회원 세미나에 여러 번 참여해봤는데, 그 때마다 변하는 나의 인생곡선에 놀라곤 한다. 내가 신입회원 세미나를 받았던 때를 기억한다. 연애경험이 없던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짝사랑 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이후, 활동가로서 세미나에 참여했을 땐 애인과 연애하게 된 사연을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애인과 함께 만들어갔던 행복을 자랑하기도 했다. 최근에 또 한 번 인생곡선을 그릴 일이 있었다. 나는 진로문제와 상담소 활동을 하면서 드는 고민들을 털어놓았으며, 레즈비언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다고 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스스로를 신기해하고 기특해했다. 고백할 수 없던 짝사랑에 가슴앓이 하며 일상을 꾸려 가는 것이 힘겹기만 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연애하는 데에 치우쳤던 생활의 에너지를, 이제 나를 가꾸어가는 데로 틀어와 균형이 잡혀가는 것 같다고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나의 레즈비언 인생 1기는 ‘짝사랑’이었고, 2기는 ‘연애’ 그리고 지금의 3기는 ‘진로’, ‘레즈비언 권리운동’, ‘레즈비언 친구 사귀기’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ㆍ2기는 레즈비언 인생에 있어서 ‘사춘기’에 해당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 겨우 ‘사춘기’를 지나온 것 같다.

나를 형성하는 정체성 중에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은 내게 아주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제까지 나는 길을 잃은 것처럼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살아갈 걱정에 우울해했다. 역할모델이 없어 몇 년 뒤의 나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레즈비언의 삶을 살아왔고, 살아내었다. 어느새 3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올 가을을, 어느 미래에 나는 또 회상하겠지. 그 때는 지금 힘들어하고 풀지 못하는 문제들이 내게서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어 있을 테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