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슨 벡델의 동명 그래픽노블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펀홈>이 국내 초연되어, 상담소로도 초대권이 도착했습니다. 회원 메일을 통해 선착순으로 나누어드렸습니다. 토니어워즈 12개 부문 노미네이트 5개 부문 수상에 빛나는 뮤지컬 <펀홈>의 국내 공연 후기를 소개합니다.
[PHR님 후기]
FUN-HOME, 제목에 두 가지 뜻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뜻이 이렇게 하나에 묶인 것처럼 뮤지컬도 그런 분위기였다. 가볍고 무거운 순간들이 연속되어 롤러코스터처럼 올라갔다 내려오는 기분으로 관람했다.
이야기는 아빠와 딸의 대화에서 시작한다. 아마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왜 전세계의 아빠들은 다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아빠교육을 모든 남자들이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 아빠의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성격들이 그대로 보였다. 그래서 더 감정이입이 잘 되기도 했고. 나는 아직 커밍아웃 하지 않아서 이에 대한 반응마저도 똑같을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그냥 피해버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미리 걱정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헤테로들은 저 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의문도 들었다. 내가 가끔 헤테로 서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헤테로도 레즈비언 서사를 이해하지 못할까? 그거 참 안타까우면서도 재미있네 싶다.
조명을 만화처럼 사용한 점이 특이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그래픽 노벨을 뮤지컬로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책을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지만 만화의 컷 느낌들을 그대로 잘 살려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요소들이 무거운 내용을 조금 중화시켜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펑펑 울면서 봤을 뻔 했다. 사실 지금의 내용에서도 이미 충분히 울컥할만한 장면들이 많았다. 특히 큰 충격에 예민한 편이라서 그런 요소가 포함되어있는 중요한 장면이 어떻게 표현될지 조금 걱정하면서 봤는데, 조명과 소리로 장면을 묘사한 것이 대단하다 느꼈다. 직접적이지 않으면서, 비극적인 요소는 모두 살릴 수 있는.
영어노래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사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배우님들 딕션이 모두 좋아서 내용을 알아듣기 힘들진 않았다. 10대, 20대, 40대의 벡델이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는 합이 정말 잘 맞는다고 느꼈다. 아빠와 벡델이 드라이빙 하는 장면도 그렇고. 노래도 만화 같아서 듣는 재미가 있었다. 아, 중간에 진짜 만화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장면도 넘 재미있었고. 제일 중요한 건 그냥 벡델이랑 조안이 다 너무 멋있다… 진짜… 둘 사이의 로멘스를 코믹하게 연출하면서도 대학생 때 경험할 수 있는 첫사랑의 풋풋함이랑 간지러운 감정을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항상 감정을 추측하면서, 혹은 나의 다른 상황에 빗대어서 감상해야 했던 것에서 벗어나 그냥 주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쉽게도 코로나로 인해 조기 종연했다고 봤는데, 다시 할 때엔 친구들 데리고 두 번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할 만한 뮤지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