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모아 부스 행사를 준비하다
2019년 3월 8일 여성의 날 제35회 한국여성대회에 우리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무지개 깃발 내걸고 부스 행사를 열었다. 대회까지 보름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 공식 부스 신청을 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여성 성소수자 단체로서 연대와 홍보의 장으로, 또 회원‧활동가 규합의 장으로 부스를 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준비했다. 짧은 기간에 모두가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쳤다.
먼저 여성의 날을 일주일 앞둔 날 활동가들과 회원들이 상담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반나절 넘게 공을 들여서 부스 안을 아기자기하게 장식할 소품들을 구상하며 손수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 각자 분담할 일도 정하고, 구호를 외치며 진행하는 투호놀이도 준비했다. 상담소 홍보와 후원금 마련을 위해 리플릿, 신입회원 가입신청서, 상담소 발간 자료집 등도 잘 챙겨두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당당히 새긴 ‘레즈비언 페미니스트(LESBIANxFEMINIST)’ 기념 티셔츠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손꼽히는 타이포그라피 전문가께서 디자인을 맡아 후원해주셨으며, 이를 평판 좋은 티셔츠 제작업체에 의뢰해 양질의 티셔츠를 사이즈별로 넉넉히 제작해두었다. 티셔츠를 담을 종이봉투에는 우리 상담소의 전신 ‘끼리끼리’의 도장을 찍어 준비해두었다.
드디어 3.8 여성의 날, 바람에 나부끼는 무지개 깃발
드디어 3·8 여성의 날이 다가왔다! 아직은 쌀쌀함이 가시지 않은 날, 정오에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준비해둔 여러 물품, 간식, 휴식용 간이의자 등 짐이 무척 많았다. 사무실에서 광화문광장까지 어떻게 오갈지 걱정이었는데, 회원들이 차량 지원부터 물품 운반까지 큰 도움을 주셨다. 이번 한국여성대회가 평일(금요일)에 열리다 보니 휴가까지 내고 나오신 회원들도 계셨는데, 다들 몸이 부서져라 그 무거운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이고 메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상담소에서는 도움을 주신 회원들께 점심으로 간단한 김밥밖에 내놓지 못했는데 어디서 그런 천하장사와 같은 힘이 나오시는지 감탄했다.
우리 부스로 지정된 자리에 가니 한국여성대회 주최 측에서 준비한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작은 현수막이 놓여 있었다. 부스 밖에 그 현수막과 미리 준비해간 무지개 깃발을 높이 달고,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기념 티셔츠도 달았다. 광장으로 쉴 새 없이 바람이 불었다. 그 탓에 좀 추웠지만, 바람 덕분에 우리 상담소가 내건 무지개 깃발과 멋진 티셔츠가 나부끼고 있었다. 무지개 깃발 아래, 회원들과 활동가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여기 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부스 준비를 마치고 오후 3시가 되자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3시 조기퇴근 시위가 열렸다. ‘비정규직 여성화 박살!’, ‘일은 여자가 하고 승진은 남자가 하냐?’와 같은 피켓을 들고서 여성노동자들이 부스 앞 대회 단상에 올랐다. 6시에 대회가 개막하고 나서는 여성운동상 시상식이 있었다. 올해 여성운동상은 2018년 1월 검찰 내부의 성희롱을 고발해 미투를 촉발시킨 서지현 검사님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였던 고(故) 김복동 선생님이 수상했다. 상담소 부스를 포함해 각 단체 부스에서 여성운동상 수상을 축하하는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여성의 날 공식 구호는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미투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였다. 상담소는 이 공식 구호에 더해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여기 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라는 두 가지 구호를 준비했다. 부스를 방문한 이들은 이 구호를 외치며 즐겁게 투호놀이에 참가했다. 방문객 한 분 한 분이 구호를 외칠 때 상담소 부스에 있는 회원들과 활동가들도 목청이 터져라 같이 구호를 외쳤다.
방문객들은 우리 부스에 전시한 자료집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런 질문도 괜찮아요.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와 지지자가 궁금해 하는 것』, 워크북『벽장 밖, 맑음』을 준비했는데, 방문객들의 높은 호응 속에서 자료집이 모자란 바람에 활동가가 긴급히 사무실에 들러 자료집을 더 챙겨서 가져오기도 했다.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탄원서를 받다
또 부스에서는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의 정당한 대법원 판결을 촉구하는 오프라인 탄원서 서명도 모았다. 3·8 여성의 날 부스 행사가 마무리되기까지 상담소는 181명의 서명을 모았으며, 이후 공대위(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에 전달해 대법원에 제출되는 데 일조했다. 이 사건에 대해 고등군사법원 2심은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대법원 판결은 정의롭게 내려지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이제 막 활동을 재개한 상담소는 이 사건에 깊이 개입하지는 못했지만, 올 1월 29일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대법원의 상식적 판단 촉구 기자회견’에 참가하고, 2월 19일 ‘고등군사법원 최악의 판결 대법원은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가: 해군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토론회’에 다녀오는 등 꾸준히 힘을 싣고 있다.
“나는 너의 용기야”
어느새 광화문 광장에도 해가 졌다. 3·8 기념 거리행진 후 열린 한국여성대회의 마지막 무대에서는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의 공연이 펼쳐졌다. ‘MA GIRLS’란 곡이 광장 곳곳에 울려 퍼졌다. “나는 너의 용기야. 너는 더는 두려워 않아도 돼. 니가 느끼는 슬픔과 불안함은 모조리 다 내가 들이마셔 버릴 테니까 넌 마음 놔도 돼.” 광장에 있는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환한 조명 아래 상담소의 무지개 깃발이 펄럭이는 풍경을 보면서 환호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울컥했다. 지난해 12월 초 임시총회를 거쳐 상담소를 재건하자는 결의를 내고, 숨 가쁘게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임시총회 개최를 위해 1년여간 애쓴 10명의 회원과 활동가들, 추운 겨울날 꽁꽁 언 손 호호 불며 비영리단체 등록과 업무 재개를 위해 세무서로 은행으로 관청으로 부동산으로 바삐 다닌 활동가들, 알아보기 쉽게 꼼꼼히 업무편람을 작성해서 새 활동가들에게 업무를 이관해주고 그간 상담소 활동을 버티어낸 고마운 이전 활동가들, 상담소 재건 후 새봄 대청소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쓸고 닦고 청소하며 소중한 땀방울을 흘린 회원들과 활동가들, 상담소가 활동 재개를 하자마자 다시 상담소를 찾아주신 회원들과 새 회원들, 일이 막힐 때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나서 크고 작은 도움을 준 많은 회원들과 익명의 후원자들, 그리고 3·8여성의 날 부스에서 그리움과 반가움으로 만난 상담소의 옛 회원들…….
석 달여 시간 속에는 언제나 함께 하는 따뜻한 우리가 있었다. 성차별과 성소수자 차별이란 이중의 억압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에 굴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꺾이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우리는 여전히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무지개 깃발 아래 모여 있다. 여기, 이렇게. 혼자가 아니라 함께 있고 그래서 우리는 괜찮다. 우리는,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 용기이고 희망이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부스 청소를 마치고 뒷풀이로 향하는 길이 너무나 좋았다. 다들 좀 피곤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래도 하하 웃거나 지긋이 미소를 주고받으며 오늘 이랬지! 저랬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참 즐거웠고 좋았다. 오고 가는 모든 따스한 마음들을 가만히, 천천히 느끼고 싶다. 2019년 3·8 여성의 날 무지개 깃발 아래 모인 우리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회원들과 활동가들, 이토록 멋진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 한 명 한 명을, 그 온기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싶다.
활동가 승짱
2019년 3·8 여성의 날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재능, 자원을 나눠주고 도움을 주신 경, 마라사드, 명이, 몽, 미아, 반제, 뽐, 셈, 슐라, 심플, 재키, 제제, 커피, 팡, 하랑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 꼬마, 나루, 려수, 승짱, 원영, 적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