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제도가 누군가를 차별하고 소외시키지 않고 다양한 가족으로 확장될 수 있기를 꿈꾸며, 성소수자 인권운동 진영에서 이끄는 ‘모두의 결혼’ 캠페인! 그리고 이와 더불어 진행되는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혼인평등 회원인터뷰! 그 세 번째 주인공, 화쟈와 그의 아내 오리를 만났다. 화쟈는 작년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사포의서재’ 퀴어콘텐츠 비평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며 처음 상담소와 인연을 맺었다. 화쟈와 나는 그 모임에서 몇 차례 함께 글을 쓰고 고치며 서로를 알게 됐다. 내 기억 속 화쟈는 밝은 웃음으로 모임에 활기와 에너지를 번지게 하는 사람이었다.
정체화, 커밍아웃, 그리고 두 사람의 만남
작년 처음 화쟈를 만났을 때 그에게는 미국인 여자친구 오리가 있었고 결혼을 계획 중이라 했었다. 당시에는 오리가 잠시 미국에 돌아가 있던 때라 화쟈의 밝은 표정 뒤로 조금은 ‘롱디’ 연애의 쓸쓸함이 깃들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랬던 화쟈가 오랜만에 인터뷰 제안을 위해 카톡을 했을 때 ‘와이프’와 함께 가도 되냐고?! 본인들을 무려 ‘신혼부부’라 소개하여 내심 흠칫 놀라고 말았다. 동성 결혼이 흔해진(?) 요즘이지만 옛날 사람인 나에게는 순간 ‘와이프’ ‘신혼부부’라는 말들이 기분 좋은 당황스러움을 안겼다.
화쟈와 오리는 각자의 가족에게 이미 커밍아웃했고, 또 결혼 전부터 서로를 양쪽 가족에 소개했었다. (너무 부러운 커플 아닌가!) 작년 오리가 미국에 돌아가 있을 때 화쟈는 오리를 만나러 잠시 여행을 갔었고 그곳에서 오리 가족들과 즐겁게 지냈다고 했다. 요즘은 서울에서 화쟈의 엄마와 남동생, 그리고 오리가 함께 만나 밥도 먹고 다정한 일상을 보낸다. (너무 부러운 상황 아닌가?!!) 하지만 이들에게도 서로의 가족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화쟈에게 커밍아웃 과정을 물었다.
마음이 바뀔까봐 타투도 하지 못하던 화쟈의 ‘결혼할 결심’
나는 이십 대인 이들이 언어와 국적을 뛰어넘어 결혼까지 결심한 것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물었다. 오리를 만나기 전부터 화쟈님은 결혼을 꿈꾸고 있던 사람이었을까.
역시 퀴어는 없는 길도 내는 존재다. 완벽하지 않은 제도와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삶을 꾸려 나가기 위해 길을 만드는 사람들. 두 사람 역시 정해진 답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사랑했고, 함께 있고 싶었고 그러다 보면 길이 생길 거라 믿었던 것 같다. 이들처럼 각자가 원하는 삶의 방식들이 하나, 둘 모이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용기를 낸다면, 더 많은 길이 생겨날 것이다.
두 사람은 비자만 해결되면 미국으로 이민을 갈 생각이다. 하지만 비자 발급 과정이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아서 1년 이상 한국에 머무르게 될 거라 했다. 가족과 삶의 터전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가겠다는 화쟈의 결심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지난 4월 두 사람은 미국 법상 공식 부부로 인정되는 화상 결혼식을 올렸다.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줌’ 프로그램을 통해 결혼식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둘은 전부터 동거했던 사이인데도 15분의 온라인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 갑자기 서로를 대하는 느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단 15분 결혼식으로 뭔가 달라진다는 게? 이런 게 가능하다고?
오리의 말에서 정말 가족이 되었다는 진실된 행복감이 묻어났다. 이 행복에 푹 빠진 신혼부부에게 나는 또 굳이 결혼의 부담과 책임감이 힘들진 않냐고 캐물었다.
좋은 소통, 좋은 부부생활을 위한 노력, 구청의 신혼부부 클래스를 뚫다
둘은 이십 대 커플이지만 매우 진지하다. 건강한 소통을 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원래 오리는 한국말을 전혀 못 해서 완전히 영어 소통만 가능했는데, 지금은 한국 사람들과 웬만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오리는 ‘사랑에 빠져서’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도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 중이라고 했다. (로맨틱한 사람^^)
작년, 둘은 구청에서 진행하는 예비부부 클래스를 이수했다. 당연히 헤테로 부부를 대상으로 홍보했던 프로그램에 레즈비언 커플이 신청하다니! 구청에서도 굉장히 놀랐을 법한 상황이었는데 구청은 이들 커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뒤이어 올해 동일한 구청에서 열린 신혼부부 클래스를 신청하여, 함께 참여한 수많은 헤테로 커플의 축하 속에 이 과정 또한 훌륭히 마쳤다.
녹록잖은 퀴어 커플의 서울 살이
두 사람의 신혼생활에도 난관은 있다. 오리는 보수적인 직업군에 있어 아우팅을 걱정하고 있다. 정체성이 알려져 직업을 잃는다면 비자가 끊겨 2주 안에 출국해야 하는 외국인 노동자 신세이다. 둘은 결혼식을 올리고 삶의 큰 변화를 겪고 있지만 정작 일터에서는 퀴어임을 밝힐 수 없어서 ‘연애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인 척 살아가고 있다.
인터뷰를 하며 만남, 연애, 결혼에 대해 벅차했던 감정들을 한껏 표현했는데 일상에서는 연애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니! 듣기만 해도 정말 슬펐다. 퀴어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우리에게 이렇게 쾌활한 모습을 보여준 화쟈님도 직장에서는 사담 자체를 잘 안 한다고 하셨다. 하나 말하게 되면 또 다 줄줄이 물어보는 게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좀 다를까?
‘제도’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다면?
미국에서 자유롭게 지내던 기억 덕분에(?) 한국에 오면 차별에 대한 체감이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았다. 씁쓸한 제도의 한계를 얘기하며 그날의 인터뷰를 마쳤다. 한국도 혼인평등 법제화는 어쨌든 몇 년 안에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실제 존재하는 우리들이 하루하루 이렇게 차별을 견디며 살고 있다는 게 참 안타까웠고 사회 변화가 더디게만 느껴졌다.
화쟈, 오리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결국 둘은 좋은 관계, 좋은 가족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둘이 만들어 가는 관계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함께 워크숍도 듣고, 언젠가 마련하게 될 집을 잘 꾸미기 위해 어플로 집도 미리 만들어보고, 같이 살아갈 토대를 든든히 다지기 위해 비자 발급도 경제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들은 결국 더 좋고 안전한 가족을 만들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미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했다. 아직 한국에서는 동성 커플이 가족을 꾸린다는 것에 한계가 너무 많다. ‘저출생 위기’를 핑계로 국가가 나서서 ‘합법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정상 가족’ 규범만 더 확산,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 2024년 한국의 모습이다. 이런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지만 사실 이 땅에는 법의 테두리 밖에서 치열하게 그리고 소중하게 자신만의 가족을 꾸려나가는 퀴어들이 있다. 한국에서도 혼인 평등,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된다면, 소중한 관계를 위해 이것저것 부단히 시도하고 노력하는 수많은 이들이 우리의 곁에, 서로의 곁에 길을 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