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권이 여기에 있다
– 6일간의 서울시청 점거농성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서울 시청 로비에 와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에서 보여준 성소수자 차별발언에 대한 사과와 인권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민이 만든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일방적으로 거부했고, 한국장로총연합회와의 간담회에 가서 공개적으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발언했으며,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과정에서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이 저지른 폭력과 혐오 발언을 방치했다. 특히 서울 시장이라는 선출직 공무원이 국제인권기준과 헌법에서 정하고 법률에 규정된 성소수자 차별금지라는 인권의 원칙을 공개적으로 버림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무시할 수 있다는 메시지와 혐오폭력을 허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공론의 장에서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는 혐오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한탄했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제 행동해야 한다!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혐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서울시청 점거라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사랑은 바로 차별과 혐오가 익숙한 대한민국 한가운데에서 벌어지기에 우리의 싸움도 여기서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
우리는 누구와 있는가
우리가 서울시청 점거농성을 무사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들어가자마자 끌려나올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밟히면 악하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분노를 보여줘야 했기에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도 우리의 점거농성은 아프고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농성장은 성소수자라서 차별과 억압을 감내해야했던 순간들을 동료들과 나누는 공감의 장이었고, 개인의 서사를 넘어 우리 모두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장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많은 시민들을 만났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와 함께 있음으로써 주는 따뜻함을 느꼈다. 우리가 싸워야할 이유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농성기간 내내 넘쳐나는 사람들과 음식들 사이, 웃음 사이로 우리는 우리의 힘을 확인했다. 저녁마다 벌어지는 축제의 장, 삶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할 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진지하게 싸우면서도 웃음과 노래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연대를 확산했다는 것이다. 하루 만에 인권, 장애, 여성, 시민사회, 노동, 소수자 등 300여개의 단체의 지지연명을 받았고, 시장면담과 사과를 요구하는 직접 행동을 벌였다. 차별에 저항하여 1000만 인구가 있는 대도시이자 수도인 서울의 시청을 점거하는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용기 있는 직접 행동에 전 세계 성소수자들과 연대자들의 지지의 목소리 등 국제적인 성원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에 왔는가
농성기간 동안 시청에서 사람들은 인권의 원칙을 확인했고 그것은 종소리처럼 서울시청 밖으로 번져나갔다.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성소수자의 존재가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존재를 가지고 찬반을 논하는 것은 모욕이다. 함께 싸우고 행동할 때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 우리가 확인한 이 원칙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가져갈 것이다.
어제 서울 시장은 무지개 농성단과의 면담에 응했다. 이후 서울시가 밝힌 입장에 대한 여러 아쉬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음은 명백한 성과이자 서울시가 책임져야 할 내용이다.
먼저 농성 5일째 박원순 서울시장은 우리의 요구 중 하나였던 무지개 농성단과의 면담에 응했으며, 성소수자인권단체와 시민사회단체 대표 6명과의 면담과정에서 “제 책임이고 잘못이다”라는 말로 사과를 표명했다.
“여러분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어떤 표현을 요구하더라도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언급했으며, “이 자리는 여러분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제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자리”, “어떤 오해나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민도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제가 여러분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실무적으로 찾아보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와 같은 발언은 그간의 농성 과정을 통해 이끌어 낸 중요한 성과이며 향후 이 발언에 대해 서울시는 책임 있는 행보를 보여야 한다.
둘째, 서울시는 공식 보도자료에서 “농성의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정리했다. 이러한 내용의 표현은 흡족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무엇보다 그는 서울시민들이 만들고 12월 10일에 선포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선포하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요구와 싸움은 계속돼야 한다. 우리는 서울시가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내용을 이행할 수 있도록 계속 요구할 것이다. 또한 공공 기관인 서울시가 혐오세력에 대해서는 인권의 원칙에 따라 대처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서울시가 향후 논의의 자리를 만들어나갈 것을 약속한 점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오늘 오전 담당자와의 면담에서 우리는 시장이 면담에서 밝힌 대로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이를 위해 성소수자인권단체와 만나 논의하고 계획을 세우기로 약속했다. 서울시는 약속을 지켜 앞으로 성소수자 인권 보장과 혐오 방지 대책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또한 다시는 선출된 공직자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 원칙을 깨지 않는 시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이번 싸움에서 확인했던 우리 모두의 힘과 인권의 원칙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의 시청 점거 농성이 오늘 마무리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세력은 단지 성소수자만을 공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의 가치를 바닥에 팽개치며 다른 사회적 약자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민, 장애인, 빈곤층… 우리는 이렇게 확대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을 방치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확대되고 있는 혐오세력의 발흥으로 우리 사회가 그동안 세워온 인권의 원칙과 제도를 뒤로 돌리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등 성소수자 인권을 부정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성북구 ‘청소년 무지개와 함께 센터’ 주민참여예산 사업 무산,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최이우가 인권위원이 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려는 개정 운동 등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싸움에 여기 모인 우리는 그 싸움에 함께 할 것이다.
2014년 12월 11일
성소수자 차별반대 서울시청 농성 6일차
무지개농성단 참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