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료 정보
자료명: 끼리끼리 송년회(레스보스)
자료 형태: 영상, 비디오.
촬영일시: 1997. 12. 27 7:50pm부터 약 9:30pm까지.
촬영장소: 레스보스
러닝타임: 약 1시간 30분.
소장: 한국레즈비언상담소
2. 리뷰
이 영상은 1997년, 레스보스에서 이루어진 끼리끼리의 1997년 송년회를 비디오로 기록한 것이다. 거울로 이루어진 벽 쪽에 97년도 끼리끼리 송년회를 알리는 그림과 문구들, 크리스마스풍 반짝이 장식이 연말의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했다. <끼리끼리 ♀♀ 송년회>라고 쓰인 문구 아래에는 섹시한 분위기의 두 여자가 산타복장을 하고 포옹을 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당시에 유행했던 HOT, 젝키, 김건모, 터보 등의 노래가 익숙하게 들렸고, 칼머리, 스포츠머리, 가죽자켓으로 멋을 낸 회원들이 바 근처와 테이블 근처에서 심심치 않게 보였다.
행사는 2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행사 1부에는 회장과 각 부문에 있는 활동가 인사, 대의원회와 후원인의 간략한 훈화, 우수회원 상 수여 등으로 이루어졌다. 2부는 97년 한 해 동안 끼리끼리가 했던 사업 BEST 5와 그 외의 굵직굵직한 활동을 보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신나는 게임이 5가지 정도 이어졌고, 서로를 위한 롤링페이퍼, 98년의 활발한 활동을 기약하는 촛불 의식으로 송년회는 끝이 났다. 영상 초반에 20여명 정도였던 사람들은 행사가 끝나갈 즈음엔 50이 훌쩍 넘어 있었다.
이 영상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당시 끼리끼리의 활동 내용이었다. 97년 끼리끼리 활동에는 "레즈가 만든 레즈 영상물"인 <더러운 날> 제작이 있다. 이 영상은 당시 활동가들이 직접 기획한 단편 영화인데, 현재 L상담소에는 주로 NG컷만이 담겨있는 비디오가 있다. 완성본을 보고 싶었는데, 비디오가 상한 건지 아니면 완성본은 따로 있는 것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당시 활동가분이나 회원분 중에 이 비디오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L상담소에 연락을 부탁드린다.
97년에는 영상물 제작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진영과 공식적으로 함께 개최한 포럼이 고마에서 열렸다. 또한 새로운 회장이 뽑혔으며, 인권학교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 뿐 아니라 97년도는 그루터기와 소프트볼 소모임이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그루터기는 물론이고, 소프트볼 소모임에서 파생된 친목모임인 '이브의 아름다운 키스'도 현재까지 활발히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 걸 보면서, 97년 끼리끼리에서 만들어진 소모임들이 지금까지도 많은 분들께 소통의 장이 되고 있는 것 같아 기뻤다.
또한 송년회에는 다양한 게임이 이루어졌다. 속옷 패션쇼는 게임 참가자가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속옷을 3벌 얻어서 입어야 하는 게임이었는데, 이 게임을 하면서 회원들은 게임 참가자에게 분주하게 나시나 브래지어를 벗어주었다. 이 게임에서는 그 브래지어를 머리에 두른 사람이 1위를 했다. 소지품만으로 복도 끝에서 끝을 연결해야 하는 게임도 있었다. 복도 끝까지 물건이 닿지 않자 급기야 바지를 벗는 사람도 있었다. 게임이 끝나고 속옷 바람으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꽤나 자유로워보였다.
다소 파격적(?)인 게임들 외에도 당시 끼리끼리 회원과 활동가들이 지향하던 여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게임도 있었다. 각 팀 별로 소품을 이용해 한 명을 분장시키는 게임이었는데, 첫 번째 팀에서는 여성들의 투쟁과 운동을 기념하면서 아마존의 여전사를 분장 테마로 잡았다. 분장한 분의 팔에 새긴 양날도끼 모양이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 팀에서는 "함부로 건들지 마"라는 주제로 여성의 강함과 권력을 나타냈다. "여성이 어떤 남성을 만났을 때, 대항하기 위해서 한 쪽에는 채찍을, 한 쪽에는 칼을 들었습니다. 강한 여성을 상징했습니다."라는 말에서 당시 끼리끼리의 진취적이었던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 팀은 가장 노출이 심한 분장을 한 팀이었는데,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여성이 정말 아름답다"란 인식에서 당당한 여성의 몸을 주제로 잡았다고 한다. 분장한 분의 어깨에 립스틱으로 쓰인 'ㄲㄹㄲㄹ(끼리끼리)'가 매력적이었다. 3명의 회원이 복도를 런웨이하자 사람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환호했다. 이 게임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나는 그녀들이 염원했던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현재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당하게 자신의 런웨이를 걸을 수 있길 바랬다.
1시간 30여분의 송년회 영상은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영상을 보면서 생각하고 느낀 점들을 더 풀어 쓸 수 있겠지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영상을 찾고, 또 보면서 자신만의 감상을 느끼길 바라기에 이 쯤에서 나의 짧은 감상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송년회가 영상으로 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또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현재 L상담소에는 끼리끼리의 초기 활동이 기록되어 있는 영상들이 꽤 존재한다. 근래의 많은 LGBT 행사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극히 제한하는 경향을 생각해보았을 때, 동성애자인권운동 초기의 생생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영상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내게 퍽 신선한 것이었다. 더불어 나는 영상을 통해 20여 년 전의 그녀들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지금의 우리는 앞으로 어떤 자료를 남길까. 10년, 20년 후 미래의 활동가와 커뮤니티 사람들은 어떤 자료를 통해 현재 우리와 만나게 될까.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