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민우회 소식지 <함께 가는 여성> 2005년 5+6월호
:: 여성운동 활력+ ::
_ 김김찬영
지난 1월 ‘제3회 전국인권활동가대회’가 열렸다. 이번 인권활동가대회에서는 새로운 인권운동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가 있어, 집회 중심의 운동 방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함께, 인권운동이 보다 대중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을 토론하였다. 토론 중 마이크를 넘겨받은 우리 단체의 김윤서이 활동가는 레즈비언 인권운동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얼굴을 드러내고 거리로, 광장으로 나가는 소위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의 활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우리의 활동방식에 대해 장애인 인권활동가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어째서 그렇게 활동하십니까? 세상을 바꾸려면 대중을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을 만나는 것만큼 효과가 큰 운동이 없습니다. 우리는 장애를 무릅쓰고 계단 높은 버스에 오르내리며 대중에게 다가갑니다.”
맞다. 그 분 말씀은 정말 맞는 말이다. 비장애인이 ‘신경 써 줘야 하는 게 귀찮아서’ 장애인이 집에만 있기를 원하는 세상, 레즈비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소수자가 거리로 나가 직접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큼 효율성 높은 운동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장애인과 레즈비언은 소수자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이기에는 또 다른 차이점이 존재한다. 레즈비언이 거리로 나간다는 건 대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아우팅(동성애자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혹은 의사에 반하여 그 사람의 성정체성을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 당해도 상관없을 때 가능한 일이다. 2000년대에도 종합일간지의 ‘표주박’, ‘휴지통’ 같은 코너에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살인 당한 기사가 실린다. 우리는 그 장애인 인권활동가의 말씀에 대해 레즈비언이 처해 있는 이러한 환경과 인권운동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솔직히 칼 맞아 죽을까봐 겁이 날 때도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거리로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활동을 하지 않거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청하는 곳만 있다면, 그 곳이 전국 어디라도 직접 발로 찾아가는 ‘동성애 바로알기 강의’를 진행하고 열린 강좌를 개최한다.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적극적으로 예방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경찰, 변호사, 다른 상담소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비록 얼굴이 노출되는 카메라 인터뷰를 하거나 영상물을 찍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보도 자료를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전화 인터뷰나 서면 인터뷰를 진행한다.
특히 다른 시민사회단체들과의 연대는, 레즈비언 인권운동을 고립되지 않게 하고 서로 힘을 주고받기 위한 가치 있는 활동 중 하나이다. 지난 2004년 3월, ‘다름으로 닮은 여성연대(장애여성 공감, 전쟁을반대하는여성연대 WAW,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이름으로 진행한 여성의 날 행사는 아직도 상담소 활동가들과 회원들에게 가슴 벅찬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단체 깃발을 들지 않고 단체명이 적힌 이름표도 붙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가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전신)’ 소속의 레즈비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우리 현실에 맞게 개사한 가요를 부르며, 장애여성의 목소리, 전쟁반대의 외침과 함께 ‘레즈비언’이라는 네 글자를 당당하게 소리 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는 지난 5월 2일 발족한 레즈비언 인권운동단체들의 연대체인 ‘한국레즈비언권리운동연대’와, 레즈비언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처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연대체인 ‘성소수자관련범죄사건지원 여성연대’,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연대체인 ‘반성폭력네트워크’, 그리고 게이 레즈비언 인권운동단체들의 연대체인 ‘한국동성애자연합’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인권단체들과 같이 하는 ‘인권활동가대회 준비모임’, 호주제 폐지의 대안으로 목적별 공부안을 주장하고 있는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 공동행동’ 등에 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레즈비언 개개인, 레즈비언 커뮤니티와의 만남을 지속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같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처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 레즈비언들 간에도 차이가 존재한다. 레즈비언 인권활동가들은 적어도 활동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만큼은 차별을 받거나 억압받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적다. 그런 일을 당하면 비교적 쉽게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살고 있는 레즈비언은 수많은 차별과 억압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이 괴로움을 토로할 곳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레즈비언 당사자들의 현실과는 괴리된 채 ‘활동을 위한 활동’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소통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레즈비언을 위한 레즈비언 인권운동의 과제들을 수행하고, 레즈비언 자긍심 갖기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진행한다.
레즈비언 이슈가 특정 담론이나 몇몇 활동가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레즈비언들의 존재 가까이에서 나온다는 믿음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개소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상담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개개인의 레즈비언들이 큰 부담을 갖지 않고 상담을 청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단체전환 이후, 상담이 3배 정도 증가했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상담을 통해 레즈비언들의 현실에 더욱 다가서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인권이슈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담소는 자체 내 사건지원팀, 교육사업팀, 인권정책팀 등의 여러 부서를 설치해 인권사안에 대해 대응하고, 연구하고, 활발한 활동 및 사회이슈화를 고민하고 있다.
아직도 상담소가 가야할 길은 멀다. 끔찍한 재정난으로 인해 통장 정리를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고, 사무실 계약을 갱신할 시기가 오면 상승한 물가만큼 월세도 올려 받으려는 주인 때문에 많은 짐을 끌고 이사를 다녀야 한다. 상근을 하는 대표와 사무국장만이 25만원의 월급을 받고, 사무실 공금으로 밥 한 번 시켜먹은 적이 없고 활동하는 사람들 차비 한 번 줘본 적이 없다. 그렇게 돈이 없으니 사람도 없다. 활동가들 대부분은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하여 상담소 활동을 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쉽게 지치고 결국 상담소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사회에 만연해있는 동성애혐오증도 활동을 어렵게 하는 이유이다. 사무실 앞에 ‘한국레즈비언상담소’라는 간판조차 걸지 못한다. 사무실에서조차 혹시 이웃사람들이 들을까봐 ‘레즈비언’ 글자를 쉬쉬하면서 발음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회의를 하거나 상담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유일한 긍지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언젠가 이 환경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이다.
나는 마포구 어느 동네, 언덕배기에 있는 9평의 사무실에서 이 글을 썼다. 이제 글을 마무리한 후 조금 울적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늦은 퇴근을 해야겠다. 오늘도 나는, 우리 사무실이 장애인 접근이 가능한 곳으로 이사하는 것, 24시간 상담 가능한 핫라인이 개설되는 것, 그리고 쉼터를 만드는 것을 소망하며 잠들 것이다. 언젠가 ‘함께가는 여성’에 글을 기고할 날이 다시 온다면, 그때는 ‘레즈비언 인권이 많이 나아져서 상담이 줄었다’는 행복한 고민을 적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