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사람> ::
_ 2006년 2월 8호
_ 케이
애인이 휴가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짤막하게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애인은 직장생활을 하느라 우리는 평소에 그리 쉽게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들뜬 우리는 한창 춥던 날씨도 풀려 느슨한 기분으로 행선지를 골랐다. 굳이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고 서울을 멀리 벗어나지 않더라도 갈만한 곳이 없을까 생각하던 우리가 바다도 볼 겸, 항구의 야경도 볼 겸해서 고른 여행지는 인천. 지하철 일호선의 종점이었다.
인천역에 이르러서는 말로만 듣던 화교거리를 구경하고, 시내 버스를 잡아타고 간 월미도에서는 엄청난 사치를 하여 회를 먹고, 하루 묵은 숙소에서는 텔레비전에서 해 주는 영화를 보며 수다를 떨었다. 맥주 뚜껑을 따고 많은 담배를 피우며, 자욱한 연기속에서 우리는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월미도는 이미 쇠락한 유원지였지만, 바람쐬러 온 우리에게는 충분히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물론 조그만 숙소 바깥의 어디에서건 우리는 일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셀 수 없이 많은 이성커플들에게 포위당해 있기 마련이었지만.
“헉. 있잖아, 봐봐. 우리 또 포위당했어.”
이는 둘 중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따금씩 내뱉곤 하는 말이다. 저녁먹을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던 거리에서도, 횟집의 따끈한 장판 바닥 위에 앉아서도 사방으로부터 이성애자들의 압박을 느낀 우리는 결국 저 말을 여행지에서까지 또 하고 말았다. 어디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엄청난 수의 남자들과 지겹게 부딪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속에서 우리가 견뎌내야 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피로함에 대한 이야기를 피토하듯 하고 있던 참이었다. 분에 넘치는 화려한 밥상을 눈앞에 펼쳐 놓고서도 그저 맛있게 먹기 보다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야길 나누다가,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앞뒤 좌우 모든 테이블이 남녀 커플 내지는 부부로 점령돼 있다는 사실을.
짜증과 분노가 미친듯이 밀려왔다.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나에게, 애인에게, 또 다른 많은 레즈비언들에게 실로 끔찍스럽게 다가온다. 주변의 이성애자들이 우리에게 딱히 해코지를 하지 않더라도, 그들 존재 자체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 우리는 음식을 내오는 종업원에게 계산을 해주는 집주인에게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에게 친한 친구사이 내지는 다정한 자매지간 정도로 비추어졌을 뿐이리라. 만일 그렇게 보이지 않고 연인으로 보였다면, 우리는 결코 편안하게 앉아 수저질을 할 수 없었으리라. 그들의 수군거림과 혐오를 담은 몸짓에 제 발이 저려 도망치듯 사람들을 피해 다닐 수 밖에 없었으리라. 이런 느낌을 지독한 피해 의식이라고 부를 건가. 남자들이 숱하게 저지르는 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으로서, 사람들의 흥밋거리에 불과하거나 적대감의 대상일 뿐인 동성애자로서, 여간해서는 마초 근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대부분의 남자들과 그 남자들을 사귀고 있는 여자들로 이루어진 이성커플들만 드글거리는 이곳에서 우리는 아프지 않을 수가 없는데.
우리의 피해 의식을 폄하하지 말라, 고 나는 주장하겠다. 과잉된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고 덧붙이겠다. 피해 의식이야말로 우리의 존재를 증명한다, 고 주저없이 말을 하겠다. 우리를 둘러싼 폭력과 편견의 굴레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스러워 하는 우리 자신을 무능한 사회 부적응자로 스스로 가치 절하하지 않기 위해, 레즈비언인 우리가 얼마나 치열할 수밖에 없는지 당신들은 모른다. 수치심을 수치스러워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삶은 끔찍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말하는데 당당하고 싶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인천으로 갈 때와는 약간 다른 루트를 택해보자 싶었던 애인과 나는 버스로 부평까지 갔다. 우리가 탄 버스는 인천역에서 제물포를 지나 부평역까지 가는 노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중간에 동일방직을 지났다. 애인이 70년대 여성 노동자 운동과 관련된 공부를 했었고, 나 역시 그 옆에서 여러가지 몰랐던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기에 우리가 동일방직 옆을 지나며 느낀 반가움은 남달랐다. 버스에 실린 채로 그저 스쳐지났을 뿐이었지만.
“앗, 동일방직이다.”
“어, 그러네. 그래도 요즘에는 동일방직 이야기, 여전히 충분치는 않아도, 당시보다는 많이 제대로 되고 있는 것 같아, 그치.”
“응, 우리 얘기도, 어쩌면, 나중에는, 더 제대로 조명될지 몰라.”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 그렇게 될까……”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 우리가 남긴 기록들, 우리가 벌인 여러가지 활동들에 대해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인석 한칸을 차지하고 나란히 앉았던 우리는 버스의 움직임을 따라 덜컹거리며 새끼손가락을 꼭 걸었다. 우리 이야기를 쓰자고, 무엇이든 써두자고. 완벽하게 짜여진 문건이 아닌 소박한 감정의 기록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이 어쩌면 더욱 소중한 자료가 되리라고 예감했다. 새삼 이렇게 마음을 먹었으니, 올 겨울은 좀 더 따뜻할까. 뿌듯하게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친하게 지내는 한 레즈비언 활동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소해 보이는 기록이라도, 소설이나 드라마가 담고 있는 것 이상의 스토리를 갖고 있을거야. 그런 기록들을 발굴하는 게 중요해. 그런 작업이 정말 중요해.’ 다음 호의 <노올자>에서는, 이런 말을 했던 주인공인 <레즈비언권리연구소>의 박김수진 활동가를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