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대학원신문 ::
_ 2006년 5월 17일
_ 선우유리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알 리 없는 일부 속편한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문화물이 늘어났다는 단편적인 현상 하나만을 보고 세상 많이 달라졌다고, 동성애자 인권이 향상되었다고 평가하곤 한다. 물론, 한국에서 동성애자 권리 운동이 활성화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 지났고 그 동안 동성애자 인권 보장에 대한 주장이 줄기차게 이어져 온 영향 때문인지 이제 사람들은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만큼은 “동성애는 생각만 해도 역겹다.”는 식으로 발언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세련되게 포장을 바꾼 혐오성 발언은 요즘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저는 동성애에 대해 편견 같은 거 없어요. 그거야 뭐, 개인적인 취향인데 어쩔 수 있나요.”
마치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제약도 없는 것처럼,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이러한 발언은 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편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동성애자들의 삶을 간단하게 왜곡시켜 버리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동성애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것은 동성애자들에게 가해지는 사회구조적 차원의 차별을, 그리고 자신이 그 차별을 행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 수 있음을 성찰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름, 거부, 혐오, 차별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입니다. 같은 학교의 동성 친구와 사귀고 있는데 어제 밤 익명으로 문자가 하나 왔더군요. ‘너희 사귀고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여자끼리 뭐하는 짓이냐. 헤어지지 않으면 너희 어머니에게 다 알려버리겠다’라는 내용으로 말이에요. 안 그래도 학교에서 이반들한테는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서 괜히 벌점 주고 불공평한 게 많아서 저희 딴엔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 많이 했는데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말 그 친구와 헤어져야 할까요?”
“직장을 옮긴 지 세 번은 된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30대 후반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흔치 않은 데다 제가 왠지 남들 앞에서는 소심해지고 위축되는 게 있어서 동료들하고 어울리는 게 쉽지가 않았어요. 이번에 다니게 된 회사에서는 일도 잘 맞고 꽤 오래 일하고 있었는데 사장이 지난 주부터 제가 알아서 일을 그만두기를 바라는지 은근히 압박을 넣고 있습니다. 같이 사는 애인이 전화를 몇 번 걸었던 것뿐인데 주변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고 남자친구도 없는 것에 대해서 말이 많았나 봅니다. 다행히 기술이 있기 때문에 어디서건 일할 수야 있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계속 직장을 옮겨 다닐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땐 정말 제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 상담을 요청해오는 내담자들의 사연 중에는 정체성 혼란에 관한 것이나 범죄사건 접수 이외에도 위와 같은 차별에 대한 호소가 많다. 아무리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동성애를 이상한 것, 비정상적인 것, 혐오스러운 것, 치료받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동성애자 정체성을 매개로 한 차별을 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 시안에 대한 한국레즈비언권리운동연대*의 입장
이법에서 금지하는 차별이라 함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지향, 학력, 고용형태,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 구분, 제한, 배제하는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제1장 총칙. 제2조 금지대상 차별의 범위)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마련한 차별금지법안의 내용 중 ‘성적(性的) 지향’이 차별 금지 대상의 하나로 포함된 것은 반가운 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개정된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성적 지향을 이유로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이미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이번 차별금지법의 경우 시정명령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등을 제한적으로 도입하고 있어 권리구제조치측면에서 미온하게나마 강제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 조항의 ‘성적지향’ 이란 용어는 동성애자를 같은 성별의 사람에게 단순히 성적으로 이끌리는 사람인 것처럼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과는 달리 동성애란 같은 성별의 사람에게 느끼는 정서적, 감정적, 사회적, 성적인 이끌림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성애자란 자신이 이러한 이끌림을 느낀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의 통합적인 정체성 안으로 이를 받아들인 사람을 말한다. 이성애자들이 이성에게 이끌리는 감정을 느낄 때 성적인 매력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또한 ‘성적지향’이라는 용어는 개인적 취향의 문제만으로 읽혀질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으로 인해 받는 사회적 차별과 괴롭힘마저 삭제해 버릴 위험 역시 갖고 있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기존의 편견을 깨거나 유지시키는 것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 동성애자에 관한 법조항이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차별금지법의 내용은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 최초의 인권법으로써 앞으로 다른 법의 제정 및 개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의 성격이 이러할진대 ‘성적지향’ 이라는 용어를 이 법안에 채택한다면, 동성애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성적인 취향으로만 취급하게 하는 편견을 강화시킬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사회 전반에 걸친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우는 동성애자들의 활동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적지향’이란 단어 대신, ‘성정체성’이란 용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성정체성이라는 용어는 성적지향이란 말은 결코 담아낼 수 없는 한 사람의 삶의 질과 행복과 관련된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는 동성애를 단순히 성적 선호도나 취향의 정도로 받아들이게 하는 용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정체성 속에서 통합적으로 이해되게끔 하는 용어의 사용이 필요하다.
성희롱과 장애 및 인종, 출신국가, 출신민족, 피부색을 이유로 한 괴롭힘은 차별로 본다. (제1장 총칙. 제2조. 4-③)
위 조항에서는 성희롱과 성별을 이유로 한 괴롭힘이 구분되어 있지 않는데, 이 두 가지는 다른 종류의 괴롭힘이므로 구분되어야 한다. 성희롱은 상대방의 성적인 수치심을 유발하는 괴롭힘을 말하는 반면, 성별을 이유로 한 괴롭힘은 어떤 특정한 성별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을 담고 있는 괴롭힘으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도 맞물려 있다.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상과 남성상에 맞지 않는 행동과 옷차림, 말투를 하는 여성과 남성은 언제나 심리적,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트랜스젠더의 경우는 출생 시 호적에 등록된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성별로 살아가고 있고, 이러한 외형적인 특징이 눈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폭력에 노출되어 피해를 입는 정도가 매우 극심하다.
성정체성을 매개로 하는 괴롭힘도 산재해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이유로 해고당하는 것을 차별로 보고 이러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둔다고 해도, 성정체성이 알려져 지속적으로 험담에 시달리고 따돌림을 당해서 결국 스스로 퇴사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대한 구제책을 동시에 마련하지 않는 한 그러한 법은 실효성이 없다고 할 수 있기에, 성정체성을 매개로 한 괴롭힘 자체를 차별로 볼 수 있는 틀이 필요한 것이다.
“성별”이라 함은 여성, 남성, 여성 또는 남성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성을 말한다. (제1장 총칙. 제4조 용어의 정의. 1)
이 조항에서는 ‘여성’ 혹은 ‘남성’에 트랜스젠더가 자연스럽게 포함된다고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호적 정정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라 할지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성으로 인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 우리 사회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권 감수성은 그렇지 못하다. 즉 자신의 진정한 성별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성이 사회에서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별 안에 트랜스젠더를 별도로 표기해 줄 필요성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라서 받는 차별이 별도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이 받는 고유한 차별을 드러내는 용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만약 트랜스젠더라 하지 않고 성전환자라고 표기할 경우,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만이 해당하게 되므로 수술을 하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트랜스젠더라는 용어가 적합하다. 트랜스젠더가 외래어이기는 하나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이 용어를 알고 있으므로 법에 사용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성적지향”이라 함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를 말한다. (제1장 총칙. 제4조 용어의 정의. 6)
성적지향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정체성으로 수정되어야 하며, 성정체성 용어의 정의를 내릴 때에도 그 종류를 나열하는 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성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해주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성소수자와 성정체성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은 만큼, 다른 법의 제정 및 개정과 사회 인식 수준에 큰 영향을 미칠 이 법에서라도 구체적이고 올바른 정의를 사용해야 한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성정체성”이라 함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중, 어떤 성의 상대에게 정서적, 감정적, 사회적, 성적으로 이끌리는가와 관련한 부분을 가리킨다. 이 때 다양한 “성정체성”은 동성애, 양성애, 이성애 등을 매개로 구분된다.’ 동성애와 양성애를 이성애에 앞서 배열하는 것 역시 중요한데, 이는 차별금지법의 다른 조항에서 여성을 남성보다 앞서 표기하듯, 이 조항에서도 차별받는 집단을 앞에 표기하여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구체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2003년부터 차별금지법을 준비해오며 작년 4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인권단체 간담회를 가졌으나 지난 3월에 있었던 공청회에서도 잘 드러난 바와 같이 인권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자세는 여전히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레즈비언권리운동연대는 2006년 초 인권위에 발송한 의견서에 위와 같은 수정보완 요구를 담았었고, 국민의견수렴 기간이었던 이번 3월에도 같은 내용으로 거듭 강조해서 검토를 요청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이 얼마나 반영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차별금지법의 최종안이 확정되는 6월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법안이 정부 진보성의 상징이나 생색내기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리고 동성애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으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법안을 검토하는 데 있어 어떤 전문가의 의견보다도 직접 차별을 경험하고 또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열심히 활동해 온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한국레즈비언권리운동연대(www.lright.org)는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에 저항하는 레즈비언권리운동단체들의 연대체로, 레즈비언인권연구소와 이화레즈비언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하늘을날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함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