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레즈비언③] 레즈비언상담소의 미디어 활용 설명서
원영
텔레비전, 양날의 칼
레즈비언 인권에 도움이 되는 무엇을 이용하든, 그 ‘무엇’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 되어 돌아온다. 가끔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들은, 텔레비전에 레즈비언 인권 활동가가 더 자주 등장해야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동성애 혐오를 좀 더 쉽게 떨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동전의 뒷면에는, 텔레비전 커밍아웃 이후 가족이 운영하던 가게가 망하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던 한 레즈비언의 뒷이야기가 숨어 있다. 실제 96년 방영된 SBS 송지나의 취재파일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레즈비언’에서 커밍아웃했던 레즈비언 몇 분이, 주변 사람들의 혐오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 드는 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한다고 해도 말리고 싶은 우리로서는, 활동을 알리는 다른 방편들을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다.
따라서 상담소에서 먼저 방송을 요청하는 일은 없고, 종종 방송국으로부터 상담소로 전화가 걸려온다. 이번 다큐멘터리에, 시사 프로그램에, 오락 프로그램에, 레즈비언 (혹은 동성애자) 이슈를 다루고 싶으니, 활동가가 방송에 출연해 줄 수 있느냐는 문의 전화가 대부분이다. 정보 수집을 위해 연락해 오는 작가 분들도 많았지만, 그 끝에는 활동가의 출연을 요청하는 메모가 함께 딸려 왔다.
텔레비전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는 활동가가 없다고 하면, ‘당신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등장해야 인권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훈계하는 작가부터, 다른 사람이라도 알아봐 주실 수 없겠느냐고 애원하는 작가까지, 방송국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커밍아웃을 권하고 요청한다. 글쎄,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이, 영화배우가 영화감독과 열애 중이라고 “커밍아웃”하는 정도의 위험을 부담하는 일이라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정중히 거절하며 한숨을 쉰다.
안타까운 건, 인권 활동이란 워낙에 소문나라고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십대들이 성정체성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현실이 알려져야, 학교에서 동성애를 사회적 일탈이나 일시적 착각이라고 가르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텔레비전이 빛의 속도로 소식을 전달하는 매체이다 보니, 커밍아웃하지 못 하는 성소수자인 레즈비언 활동가도 이 통로가 탐나고 아쉬운 건 사실이다. 우리보다 앞서 활동했던 레즈비언 언니들도 같은 이유로 텔레비전 커밍아웃을 결심했을 것이다. (물론 텔레비전의 독점성이나 자의성 때문에 텔레비전 자체를 거부하는 활동가들도 많다.)
텔레비전 밖으로
텔레비전을 대신해 다른 온/오프라인 언론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이 남아 있다. 각 언론사에 정성껏 내용을 추린 <보도자료>를 부지런히 배포하고, 심지어는 약식 기사까지 작성해서 보냈다. 혹여라도 레즈비언 이슈가 선정적으로 보도되지 않기 위해 활동의 의도와 골자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보도자료>를 보내면 당연히 실어주는 줄 알았던 활동가들은 연이은 누락에 실망하고 슬퍼했다. 상담소의 <보도자료>는 말없이 거절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레즈비언 상담소의 상담 통계 발표로 알아보는 레즈비언의 인권이나 신문 모니터링 토론회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언론을 무슨 수로 탓할까. 아니, 어떻게 탓해야 좀 더 효과적일까. 레즈비언 인권 활동에 있어, 언론이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끈이라는 ‘고지식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더 많은 언론을 고민한다.
우리는 고립되어 있는 레즈비언에게 또 다른 레즈비언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레즈비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혹은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더 올바른 정보와 강한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는 매체를 상상한다. 텔레비전이 촛불 든 사람들의 소리를 삭제해도 또 다른 곳에서는 그 소리를 전하는 것처럼, 레즈비언이 없는 것처럼 보도하는 기성 미디어 대신 레즈비언의 이슈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다른 미디어를 찾는 일이, 여전히 우리의 과제다.
원영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입니다.
http://hr-oreum.net/article.php?id=1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