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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05년 3월 5일
_ 공지훤
안녕하세요.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의 활동가 공지훤이라고 합니다. 지난 달 25일에 열린 ‘커밍아웃의 정치학, 아웃팅의 윤리’ 토론회를 지켜보고, 여기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해서 글로 옮겨보았습니다. 토론회에선 끼리끼리의 ‘아웃팅 방지 캠페인’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이 오셔서 열띤 논쟁을 벌이셨는데, 그런 관심에 대해 정말 놀랐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또한 끼리끼리의 운동에 대한 논의 자리를 마련해주신 레즈비언인권연구소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그 자리가 ‘아웃팅 방지 캠페인’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였다고 생각하며, 동성애자에게 ‘아웃팅’이 얼마나 삶에 위협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레즈비언이자, 레즈비언 인권운동가인 저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드는 분위기 때문에 고민도 많았습니다. 저는 토론회의 논쟁 속에서 ‘레즈비언의 현실’은 어디쯤 있는가를 질문해보게 되었습니다. 레즈비언 운동과 레즈비언의 현실에 대한 저의 글이 길긴 하지만 관심 가지고 끝까지 읽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1. 커밍아웃을 둘러싼 레즈비언의 현실
저는 끼리끼리에 가입하기 전에도 지인들과 레즈비언 커뮤니티, 학교 친구들에게 몇 번의 커밍아웃을 했지만, 끼리끼리 활동을 시작하면서 훨씬 더 많이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레즈비언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크고 작은 커밍아웃을 수도 없이 많이 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저는 사회적인 커밍아웃(언론에 얼굴이 드러나거나 신상이 다 밝혀지는)을 할 준비는 아직 되어있지 않습니다. 동성 결혼이 동성동본 결혼인 줄로만 아시는 저의 부모님과, 대표적인 호모포비아 집단이라고 얘기되는 취직자리 등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가 없는 저의 현실입니다.
레즈비언 인권운동을 같이 하는 활동가들은 커밍아웃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이 정도 범위에선 커밍아웃을 하자’, ‘몇 년 후에 00씨는 언론에 커밍아웃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커밍아웃 하길 바라는 말도 꺼내곤 합니다. 그렇지만 제 상황에선, 커밍아웃을 하고 살 길이 막막해진 저에게 주위의 레즈비언 활동가들이 한푼 두 푼 모아서 생계비를 지원해준다고 하더라도, 현재 사회적 커밍아웃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성애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동성애자라면 알 수 있는 동성애자의 현실이 있습니다. 동성애자는 커밍아웃을 해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를 긍정하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불행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도 긍정하고, 타인으로부터도 긍정 받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은 가능하면 혼자 떨어져있지 않으려고, 다른 동성애자들을 찾아 커뮤니티를 만들고 서로 만나서 돕고 지지를 해줍니다.
그런데 이성애주의 사회는 동성애자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자들은 커밍아웃을 해야만 살 수 있지만, 커밍아웃을 하면 살 수가 없게 된다”는 모순된 말도 생긴 것 같습니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동성애자가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현실은 서양의 드라마 속 문화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는 대다수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보다 용기가 없거나, 괜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저처럼 커밍아웃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끼리끼리에서는 동성애자에게 성정체성에 대한 상담을 할 때, 커밍아웃은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 아웃팅의 의미, 아웃팅의 피해들
끼리끼리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많은 범죄와 사건들을 알게 됩니다. 이성애자들이라면 경찰서로 갔어야 할 일들이 동성애자의 경우엔 온통 다 끼리끼리로 접수가 됩니다. 폭행, 사기, 해고, 협박, 강간, 감금, 스토킹, 인신매매까지 무서운 사건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끼리끼리에 문의를 해옵니다. 끼리끼리에서 그 분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한계가 있지만, 그나마 끼리끼리라도 없으면 그 분들은 어디에도 호소조차 하지 못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에 늘 최선의 도움을 드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많은 범죄와 사건들이 거의 대부분 ‘아웃팅’ 위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웃팅’시키겠다고 협박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고, 아웃팅을 시켜서 피해자를 폭력에 노출시키고, 오갈 곳 없는 신세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범죄의 피해자인 동성애자는 더 큰 ‘아웃팅’ 위협 때문에 법적, 제도적인 구제절차를 밟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매일 보고 있습니다. 차별을 겪는 동성애자에게 실질적으로 생존권과 안전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법제도도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의 인권은 너무나 열악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끼리끼리는 ‘아웃팅’이 동성애자의 삶에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를 알리고, 아웃팅을 방지하고자 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끼리끼리에 접수된 아웃팅 피해사례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의 표출로 아웃팅 협박을 하거나 아예 아웃팅을 시키는 경우도 있고, 아웃팅시키겠다고 협박하고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의도적인 아웃팅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당사자를 궁지에 몰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가해자는 이성애자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일 수도 있습니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동성애자들이 현재 겪고 있는 피해와 폭력으로부터 구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고, 이성애주의 사회가 얼마나 동성애자에게 폭력적인지를 알리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웃팅 협박과, 아웃팅을 빌미로 한 범죄에 대해 강력히 처벌하는 법제도가 마련되고, 언론 등을 통한 아웃팅에 대해서도 법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타인을 아웃팅시키는 행위가 어떤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보고,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 아웃팅 방지 캠페인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에 대해
저는 토론회가 끝나고 열심히 생각을 해봤지만,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지금 레즈비언들의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꼭 필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토론회에서 아웃팅 방지 캠페인을 ‘네거티브’라고, 비판조로 얘기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에 대해서 놀랐습니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 때문에 커밍아웃에 대한 공포가 생긴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솔직히 놀랐습니다.
동성애자라면 커밍아웃과 아웃팅이 다른 개념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레즈비언 인권운동가들은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지지하고, 아웃팅은 방지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에게 있어서 커밍아웃의 희망과 아웃팅의 위협은 양분되어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동성애자 인권운동도 마찬가지로 커밍아웃의 기반을 만드는 운동과, 아웃팅을 방지하는 운동을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은 네거티브라 안 좋고, 어떤 것은 포지티브라 좋다고 나누어서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얘기는 이론적으론 가능한 얘기겠지만, 동성애자의 현실에선 조금 먼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에서조차 서로의 성정체성을 이야기하면 안 되느냐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아마 이런 예들 때문에 아웃팅 방지 캠페인에 대한 우려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레즈비언들 간에 서로의 성정체성을 아예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웃팅 방지 캠페인의 목적은 아니라는 걸 대다수 동성애자들이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폭력이든 그 개념이 너무 확장되면 모든 행위가 폭력이 되어버린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웃팅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폭력이나 범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끼리끼리만이 아니라 상담을 받는 다른 여성단체들에서도 상담을 하다 보면 내담자가 무리하게 피해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해를 받은 것은 사실이어도, 그렇다고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대응하기엔 무리가 많이 따르는 경우들도 많다고 합니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도 상식에 맞게 생각하고 적용한다면, 동성애자들을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웃팅 방지 개념을 너무 민감하게 해석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에 대해선 끼리끼리에서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덧붙여서 아웃팅 피해사례 게시판을 열어둔 것에 대해서도 커밍아웃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요. 그렇게 따진다면 어떤 운동도 벌여나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커밍아웃을 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아웃팅 방지 캠페인 때문에 커밍아웃을 못한다는 것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이 알려졌을 때 겪을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커밍아웃을 하려고 한다면, 한 번 더 생각을 해보라고 조언을 하는 것이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끼리끼리는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언제나 지지하며 ‘준비된 커밍아웃’을 할 수 있도록 돕고, 무턱대고 커밍아웃을 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4. 레즈비언 인권운동의 현실과 딜레마
‘동성애자임이 당당하다면 왜 아웃팅을 방지하려 하느냐’라는 비난을 호모포비아적인 태도를 가진 이성애자들로부터 듣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편견과 폭력 때문이지, 동성애자가 당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다”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동성애자로부터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아는 문화라던가, 적어도 동성애자 인권침해에 대해 예방하고 구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사회라면 아웃팅으로 인한 피해가 지금처럼 속출하지도 않을 것이고,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아웃팅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끼리끼리에는 일주일에 2~3번 꼴로 남녀동성애자들이 아웃팅 문제로 상담과 도움을 요청해옵니다. 직업 상 아웃팅이 되면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직장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인 경우, 상담요청을 받은 끼리끼리 인권운동가는 내담자에게 “최악의 경우엔 동성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직장에서 호모포비아처럼 행동하라”는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이론 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끼리끼리 활동가들은 한숨을 짓습니다. 동성애자 인권단체가 동성애자에게 동성애를 혐오하는 말과 행동을 하라고 조언을 하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내담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동성애자인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떳떳하게 밝히세요.”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끼리끼리에 전화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피해자에게, “동성애자란 것이 밝혀져 직장에서 해고 당하면 복직투쟁을 전개합시다!”라고, 순교를 강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성애자와 동성애자 인권운동가의 현실입니다.
미국에선 게이들이 게이인권 신장을 위해 일부러 ‘아웃팅’ 전략을 펴기도 했던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아웃팅 방지 캠페인에 대해선 이해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웃팅 방지 캠페인이 아니라, 오히려 아웃팅을 해서 동성애자의 존재가 드러나게 한 다음, 이후의 차별에 대해 대응하는 것이 동성애자 인권운동가의 자세일까요. 미국에서도 비판이 있었지만, 더욱이 한국 사회와 전혀 문화적인 기반이 다른 외국의 사례와 이론을 한국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레즈비언에게 일어난 피해 사례 중에는, 사회적으로 알려졌을 때 파장이 엄청나게 크고 레즈비언 인권 신장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건들도 있습니다. 생각 같아선 언론에 대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것이 또한 인권운동가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건 대응 과정에서 당사자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본인이 그것을 원치 않는데 어떻게 한 사람을 아웃팅시켜서 레즈비언 인권의 초석으로 삼겠습니까. 그것은 여성주의적으로도 옳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5. 사회적 커밍아웃을 한 선배님을 뵙고
이번 토론회 객석에는 제가 이름만 들어본 적이 있는 1대 끼리끼리 인권운동가 선배님이 오셨습니다. 과거에 투쟁적으로 인권운동을 하셨던 분들을 지금의 활동가들은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레즈비언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토론회에 참석하신 선배운동가를 보고 정말 반가웠고, 인사는 못 드렸지만 끼리끼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분을 존경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토론회에서 아웃팅 방지 캠페인이 여성들의 “부르카”를 벗기는 게 아니라 (부르카를) 더 견고하게 짜는 것과 같다고 비판을 하셨지요. 그 말씀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과 강간, 사기 사건들이 ‘아웃팅’을 빌미로 해서 일어나는데, 그렇게 큰 피해를 입고도 도움요청도 하지 못하는데, 동성애자임이 알려지자 마자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레즈비언 인권단체가 벌이고 있는 아웃팅 방지 캠페인을 그런 비유를 들어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에, 사회적인 커밍아웃을 하신 선배님이 (아마도 사회적) 커밍아웃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늘 숙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레즈비언 인권운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가족과의 관계가 깨지고 노동권을 박탈당해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처하게 될 것을 두려워해서 사회적인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저의 모습에 대해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레즈비언의 현실이 열악한 만큼 보다 희생적인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6. 레즈비언 대중을 향한 운동
또 한 가지 토론회에서도 나온 얘기들 중에 끼리끼리가 누구를 대상으로 운동을 하는가에 대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레즈비언 지식인들 중 일부는 끼리끼리가 대상으로 하는 레즈비언이 누구인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끼리끼리가 너무 ‘피해자성’만을 강조해서 당당한 레즈비언, 즐거운 레즈비언 상을 간과해버리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레즈비언들의 상황이 다양한 만큼 레즈비언 인권단체가 모든 레즈비언들의 현실을 다 대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레즈비언 인권단체가 누구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끼리끼리는 누구보다 이 단체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들을 위해 더 많이 노력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곳에서 일하다 보면 여러 레즈비언 커뮤니티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정말 극소수의 레즈비언들은 재정적인 어려움도 없고, 자신들만의 커뮤니티에서 별 문제 없이 서로 즐겁게 지내고 있기 때문에 레즈비언 인권 이슈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가족이나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동성애자 정체성이 받아들여지고, 스스로도 호모포비아에 시달리지 않아서 레즈비언임이 자랑스럽고 당당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늘 혐오하고, 불행해하는 레즈비언들도 많이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학력에 따라 레즈비언들의 인식이나 생활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밤잠 못 이루며 직장에서 아웃팅될까 봐 걱정하는 레즈비언들도 있습니다. 아웃팅 위협 속에서 강간을 당하는 레즈비언들이 있습니다. 오래 활동을 해 온 조직에서 아웃팅을 당한 뒤 쫓겨난 레즈비언이 있습니다. 남성과 결혼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며 잠적해버리는 레즈비언들도 많이 있습니다. 끼리끼리가 현재 어떤 레즈비언들을 운동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는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끼리끼리가 고통을 받는 레즈비언들의 인권을 위해서 활동하는 것이, 그보다 덜 고통 받는 레즈비언들을 소외시키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모든 레즈비언들의 인권향상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레즈비언의 피해에 대해 집중하는 것은 레즈비언 인권단체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일 뿐입니다. 동성애자가 사회에서 겪는 피해에 대해 대응한다고 해서, 그것이 동성애자의 자긍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걸로 이해되어선 안 되지 않을까요.
토론회에서 아주 아쉬웠던 점이 있습니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오신 참석자들 중에서 레즈비언 인권단체인 끼리끼리가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지지하고 호모포비아(내 안의 호모포비아, 사회적 호모포비아)에 대항하기 위해 쏟았던 노력과 시간들과 활동들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계신 것 같지 않았던 점입니다.
커밍아웃에 대한 상담과 지지와 지원은 끼리끼리 운동 10년 동안 빠짐이 없이 계속된 운동인데, 어째서 특정 사람들은 끼리끼리를 향해 ‘아웃팅 방지’라는 네거티브 운동만 하고,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운동’은 하지 않냐는 비판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요. 끼리끼리의 거의 모든 운동이 사회의 호모포비아에 대항하는 활동이고, 레즈비언이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운동이란 걸 모르는 것일까요. 끼리끼리가 운동에 대한 홍보를 잘 못해서 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오해하시는 분들께도 끼리끼리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7. 레즈비언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며
사실 끼리끼리 회원들과 활동가들의 정체성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끼리끼리에는 다양한 나이와 학력, 직업, 지역의 회원들이 가입해있고, 이들 중에는 이론가들도 있고, 여성운동단체의 활동가도 있고,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레즈비언 계에서 ‘진정성’ 논란이 가장 많이 일었던 소위 ‘팬픽이반’이라 불리는 분도 저와 함께 끼리끼리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레즈비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 단체에 가입하고, 인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끼리끼리는 현재 위치상 모든 레즈비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레즈비언을 만난 것만으로 반가운 사람도 있고, 끼리끼리 안에서조차 레즈비언에 대한 혐오감으로 다른 회원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레즈비언임이 자랑스러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데 어울리다 보면 여러 가지 마찰도 생기고, 서로 이해하게 되는 면도 있습니다. 가치관의 차이는 많더라도 그저 다른 레즈비언들에게 무엇 하나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 현재 끼리끼리에서 활동하는 인권운동가들의 마음입니다.
토론회를 통해서 레즈비언 이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많이 뵐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이 모두 끼리끼리 회원이 되거나 끼리끼리에서 인권운동을 같이 하지는 않더라도, 레즈비언 인권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하기에 반가웠다는 말씀도 전합니다.
덧붙여 토론회의 분위기를 보았을 때는 그 자리에는 다른 레즈비언들에 비해서 커밍아웃을 많이 하고, 레즈비언 정체성을 당당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이 더욱 용감하게 커밍아웃을 하고, 행복한 레즈비언상을 만들고, 사회적인 커밍아웃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레즈비언 인권운동가가 사회적인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레즈비언 인권운동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레즈비언의 커밍아웃에 대해 끼리끼리는 언제나 지지해왔고, 앞으로도 지지할 것이며, 또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