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서 행복~’에 감염되지 않길
결혼 압력을 받고 있는 레즈비언에게
나루 기자
2007-02-26 23:53:14
<필자 나루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Lsangdam.org)에서 상담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는 결혼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레즈비언의 내담 요청이 참 많습니다.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부분 중 하나는, ‘결혼 압박을 가해오는 가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사실 경제력은 레즈비언이든 아니든,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여성 모두에게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남성들에 비해 임금도 적고 승진의 기회도 드물며, 이직과 재취업이 쉽지 않은 실정이니까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은행 대출을 받기란 참 어려운 일이고요.
경제력은 비혼의 필요충분조건?
그런데 레즈비언 스스로 경제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계획하는 것은, 결혼 압력을 가해오는 가족들이 “결혼하지 않고 살려면 네가 돈을 잘 벌어야지!”라고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인 것 같습니다.
설을 지내러 고향집에 다녀오면서, 저 말을 참 많이 들었는데요. 현재 충분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으니, 마치 ‘협박’처럼 느껴지더군요. 나의 수입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잘 먹고 잘 살아 보라’는 것은 너무 잔인한 말이기도 하고요. 또한 저 말을 뒤집어 보면 “결혼을 하면 스스로 돈 벌 걱정은 덜 해도 된다” 가 되기도 합니다.
자본이 여성과 남성에게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안정된 경제력을 갖추라’는 말이 꼭 필요한 조언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싱글’, ‘소비지향적인 싱글족’ 등의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비혼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경제력을 앞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상담을 하면서도 레즈비언들에게 경제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차별적인 현실을 간과하는 게 되지 않을지, 마음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레즈비언은, 우리 사회 기존의 ‘여성성’ 이미지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직이 더 어려워지는 특수한 상황에 있기도 하지요. 결국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독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기 위해서 여성이 독해질 수밖에 없게 하는 우리 사회의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끊임 없이 ‘결혼하지 않으려면 돈 잘 버는 모습을 보여라’ 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고 불안해지더군요. 나는 수입과 상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것에 자긍심을 갖고 싶은데 가족들이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여성운동과 레즈비언 권리운동이라는 점을 세세히 말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이 가뜩이나 아쉽고 섭섭한 데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마음을 다졌어요. 상담을 할 때, 경제력이나 물리적인 독립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심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라고 말하고는 하거든요. 결국 나도 아직 심적인 독립을 더 시도할 필요가 있겠구나, 라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회가 부추기는 ‘불안’으로부터 거리 두기
사실 비혼을 계획해 놓고도 결혼 압력 앞에서 마음이 많이 흔들리거나 끝내 이성 간 결혼을 하게 되는 많은 레즈비언의 경우, 경제력보다 더 큰 이유는 불안감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 상태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는 것을 볼 때면 홀로 고립되는 느낌이 들고 외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특히 나이 든 레즈비언이 쉽게 만날 수 없어 역할 모델의 부족하다는 것은, 이성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레즈비언의 노후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부재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레즈비언들은 ‘혼인과 출산, 양육으로 이루어진 결혼이 정상적인 것’이라거나 ‘자녀는 노후에 있어 꼭 필요한 비빌 언덕’이라는 식의 이성애주의와 동성애 혐오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되지요.
어떤 레즈비언 지인은 ‘결혼을 하지 않으니, 내가 인생의 올바른 순환 사이클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불안의 반대말은 안심일 텐데, 안심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비혼 생활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은 경제력이 아니라 독립과 그를 통한 안정이 아닐까요.
가족들의 결혼 압력에서 초연해지기 위해서는 경제적 독립보다도 심적인 독립이 더 중요할 거에요. 가족들이 내 모든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아는 동시에 가족들에게 내 모든 상황을 보고하거나 털어놓을 필요가 없다고 안심하는 것. 가족들이 쏟아내는 말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심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러면서도 가족들의 말에 때로는 웃으면서 대꾸하고 농담으로 넘기고, 때로는 반박하고 논쟁하는 현실적인 요령을 갖는 것.
그리고 이성애자 친구들이 입는 웨딩드레스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며, 그들이 발산하는 ‘여자라서 행복해요 오로라’에 감염되지 않도록 심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결혼 압력에 흔들리는 레즈비언 친구가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혹시 끝내 이성 결혼을 택한 레즈비언 친구가 있더라도 나 자신의 자긍심이 사라지지 않도록 스스로 돕는 것도 중요할 테고요.
그렇다고 물론, 우리 스스로 경제력에 대한 나름의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우는 일의 필요성이 사라지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 ‘결혼하지 않고 살려면 돈을 많이 벌어라’ 는 말에 덜 얽매이고자 노력해볼 참이에요. 내가 노력해야 할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나의 레즈비언 정체성에 자긍심을 갖고 돈은 내가 목표하고 계획한 만큼만 벌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데 안심하는 일일 테니까요.
결국 ‘결혼하지 않고 살려면 돈을 많이 벌어라’ 라는 말에서 독립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겠습니다. 결혼 압력을 받고 있는 레즈비언 분들께 힘내라는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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