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시 님, 답변을 드립니다.

 

픽시 님, 답변이 몹시 늦었습니다.

이달 초에 글을 남기셨는데 벌써 유월이 눈앞이네요.

상담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상담원은 픽시 님에게 가장 먼저 

이 두 가지 말씀부터 드리고 싶어요.

 

첫째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긍정하시는 모습이

참 반갑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감정과 욕구에 대해,

자기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경험에 대해,

어머니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감함이

무척 멋지다는 것이고요.

 

픽시 님은 매우 용감하고 멋지신데

그런 딸한테 어머니가 보이신 반응이 많이 안타깝습니다.

 

여자끼리 성관계 하면 법에 걸린다는 등

사실이 전혀 아닌 이야기로 

딸에게 겁을 주셨고요.

 

딸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시기보다

그저 지나가버리고 말 의미없는 일로

가볍게 취급하셨지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마 십대 때 그러다 말겠지 하는 심정이셨겠지요?

 

그런 어머니 심정에는

딸이 십대가 지나서도 계속 그러거나

얘가 여자한테 연애 감정으로 성적으로 끌리는 게 정말 사실이면

그 때는 정말 큰일이라는 판단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을 터이고요.

 

그러니 픽시 님이 어머니가 보이신 반응에 많이 화가 나실만도 합니다.

 

픽시 님 입장에서는 

어머니를 믿고 어머니에게 지지받고 싶어서 

털어놓은 이야기였을 터인데

제대로 이해받는 건 고사하고

여자로서 여자 좋아하는 건 병이고 범죄라는 

이야기를 듣기에 이르렀으니 말이어요.

 

그럼

사연 끄트머리에 번호 붙여서 질문하신 바에 대해

차례대로 답변을 드려 볼게요.

 

1. 한국에서 여자끼리 서로 합의하여 갖는 성관계는 전혀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아요.

세계적으로도 많은 나라들이 동성 간의 합의된 성관계를 처벌하는 법을 없애 나가는 추세고요.

어머니가 완전히 틀린 정보를 가지고 계셨어요.

아니면 어머니 역시 그런 법은 없음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딸한테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도 모르지요.

 

2. 레즈비언인 거 당연히 병이 아녜요.

여자로서 여자에게 설렐 수 있어요. 잘못 아녜요.

여자로서 여자한테 성적으로 자극받고 흥분할 수 있어요. 

여자와 여자가 연애하고, 섹스하고, 살림차리고 살 수 있어요. 그래도 돼요.

(아직 한국에서 동성 배우자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장치는 없지만 많은 단체/활동가들이 노력 중이에요)

여자와 여자의 사랑과 성관계, 지극히 자연스러워요. 

고치지 않아도 돼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해요.

레즈비언으로서 여자와 사랑하든

바이섹슈얼(양성애자) 여성으로서 여자와 사랑하든

다 괜찮아요.

 

3, 4, 5에 대해서는 한꺼번에 말씀 드릴게요.

 

상담원은 픽시 님이 어머니에게 커밍아웃하고 지지받는 과정,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해요.

 

어머니가 픽시 님의 말에 전혀 귀를 안 기울이시는 건 아니니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접근해 보시면 좋겠어요.

 

그런데

당장 픽시 님이 본격적으로

나는 여자한테 단순히 호기심이 있는 게 아니라

진짜 좋아한다 이거 굉장히 진지한 거다

내가 양성애자라는 건 장난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나가면

어머니 쪽에서도 맞불 놓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도하실 수 있으니

일단은 어머니에게 너무 한꺼번에 쏟아놓지는 말기로 해요.

어머니가 덜컥 겁을 먹어 버리시면 픽시 님이 오히려 피곤해질 수 있어요.

 

다만 동성애나 양성애에 대한 화제로 모녀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경우

어머니가 자꾸만 영 틀린 이야기, 편견과 통념에 기반한 잘못된 이야기들로

픽시 님을 교정하려고 하시면

어머니에게 저희 상담소를 소개해 드리세요.

저희는 레즈비언이나 바이섹슈얼인 분들의 부모님, 가족 분들 상담도 하니까요.

 

어머니가 어머니로서 하기 마련인 고민을 꼼꼼히 짚어 나가며

궁극적으로는 어머니가 픽시 님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또한 상담소 홈페이지를 보시면

“고민있어요?” 메뉴 중 “성소수자의 가족과 친구”라는 항목이 있는데

거기 실린 내용이 어머니께 도움이 될 만해요.

한 번 읽어 보시라고 권해 드리셔도 좋으리라 생각해요.

 

바로가기> http://lsangdam.org/faq/성소수자의%20가족과%20친구/

 

픽시 님 어머니와 같은 입장의 분들이 모여

자녀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모임도 있답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의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모님”과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성소수자 가족모임,”

이렇게 두 곳이에요.

 

역시 어머니께 도움이 될 정보이니 픽시 님이 어머니께 알려드리세요.

 

어머니도 좀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당신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다른 부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시다보면

딸을 차츰 더 이해하실 수 있게 될 거예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실 수 있게 될 거예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단체 홈페이지: http://www.lgbtpride.or.kr

>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모임: http://cafe.naver.com/rainbowmamapapa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 단체 홈페이지: http://chingusai.net

> 성소수자 가족모임: http://chingusai.net/xe/family_gathering

 

어머니에게 이미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밝힌 상태이시니

일부러 이성애자인 척 행동하시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억지로 남자를 혹은 남자만 사귀려고 노력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다만 여자 친구가 생길 경우 어머니가 알게 되시면 

막으려고 하실 수 있으니

자랑하고 싶어도 좀 참고

요령껏 어머니 눈을 피해 사귀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어머니가 픽시 님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고

픽시 님이 좋아하는 사람,

픽시 님이 사귀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해 주실 수 있게 됐을 때

그때 마음껏 소개하고 자랑하고요.

 

결혼은 꼭 해야한다는 법도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어요.

여자와든 남자와든 결혼을 하고 싶으면 하고 원치 않으면 안 하면 돼요.

지금 한국에서는 동성 간의 법적인 결혼이 불가능하지만

픽시 님이 성인기로 진입할 무렵에는 동성 간의 혼인 또한 

법제화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요.

사회가 그렇게 변화해 가면 어머니의 생각이 바뀔 확률도 늘어나겠죠?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어머니와 성정체성 문제로 갈등이 계속 생기고

어머니가 픽시 님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픽시 님을 바꾸려고 강제하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하면

주저하지 말고 상담소로 바로 알려주세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기가 느끼는 감정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자기가 사랑했던 경험

하나하나 소중하게 보살피며 생활해 나가시고요.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픽시 님을 응원하며

오늘 상담글은 이만 마칩니다.

 

20150530H

 

 

 

 

 


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