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 님, 답변을 드립니다.

ㅇㅇ 님, 상담원입니다.

본인 성적지향/성정체성을 대체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지 고민의 정도가 극심하다고 

힘들어 미치겠으니 제발 도와달라 호소하셨는데

답변이 이렇게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글을 남기시고 난 뒤로 거의 두 달 가량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마음이 많이 쓰여요.

 

마음 속을 어지럽히는 고민이 점점 더 엉키지는 않았을지

일상 생활을 이어 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을지

두루 걱정이 됩니다.

 

상담원은 상세한 이야기로 넘어가기에 앞서

크게 두 가지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어요.

 

첫째는 혼란스러운 만큼 혼란스러워 하셔도 괜찮다는 거예요.

 

스스로에게 중요한 문제고 그만큼 쉽지 않은 문제이기에

삼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오신 것일 터이니까요.

 

혼란스러워 할 가치가 충분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 고민하게 되는 거구나 생각하며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시면 좋겠어요.

 

혼란스러운 만큼 고민되는 만큼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고민해 나가면 되는 거거든요.

 

벌써 삼 년째 힘들어 죽겠다는데

혼란스러운 만큼 혼란스러워 해도 된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상담원이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삼 년째 고민해 왔는데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마시라는 데 가까워요.

 

자기 페이스대로 가면 된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둘러 결론지으실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니까요.

 

둘째는 

어떤 정해진 기준에 자기가 맞는지 안 맞는지를 점검하는 걸 통해

성적지향/성정체성을 판별하려 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배경, 다른 계기, 다른 시기에

자기 성적지향/성정체성 탐색을 시작하게 되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탐색 과정을 거쳐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답니다.

 

ㅇㅇ 님도 ㅇㅇ 님이 고민하게 된 계기들을 중심으로

ㅇㅇ 님 방식대로 그렇게 자기 경험을 해석하시면 돼요.

스스로 해석한 바에 따라 자기 성적지향/성정체성을 이름 붙이시면 되고요.

 

동성애자이기 위해서는 일정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거나

양성애자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필요한 경험의 목록이 정해져 있다거나

그렇지 않아요.

 

지금부터

바로 이 두 번째 지점으로부터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해요.

 

앞서서 자기 경험을 스스로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성적지향/성정체성을 규정하면 된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상담원은 ㅇㅇ 님 글을 거듭 읽는 가운데

ㅇㅇ 님이 자기 경험을 인식하는 하나의 패턴을 발견했어요. 

자기 감정과 욕망에 대해

환상이 아닐까, 착각이 아닐까, 동경이 아닐까 

자꾸 의심하고 검열하는 패턴이요.

 

저는 ㅇㅇ 님이 자기 경험을 

그런 의심과 검열을 걷어내고

다시 들여다 보시기를 권하고 싶어요. 

아니, 그렇게 권하기 전에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검열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부터 시켜 드리고 싶어요.

 

팬픽을 읽으며 동성애를 처음 접하게 되었든

어떤 매체에서도 특별히 동성애를 접한 적 없는데

어쩌다 보니 동성의 상대에게 끌리고 있는 스스로를 깨달았든

문자 매체로 동성애물에 입문했든

영상을 통해 동성애물에 처음 접근했든

다 괜찮아요.

 

무엇을 계기로 동성에게 끌리게 되었다고 해서

동성에 대한 끌림이 진짜가 되고

무엇을 계기로 동성애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동성에 대한 호감과 흥분이 가짜가 되고

그런 거 아녜요.

 

어떤 계기를 통해 동성애에 입문해야만

착각이 아니라 진짜고

어떤 과정을 거쳐 동성애물에 성적인 자극을 받아야만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며

어떤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만

동경에 불과하지 않고 진짜 연애 감정이다, 라는

기준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요.

 

앞서도 말씀 드렸듯이

사람마다 자기 성적지향/성정체성을 

처음 의식적으로 탐색하게 되는 계기는 다 달라요.

그리고 저마다의 버전은 다 고스란히 가감없이 존중돼야 마땅하고요.

 

그러니

동성의 상대에게 설레이고

여자끼리의 섹스를 생각하면서 성적으로 흥분되고

남자한테는 여간해서는 관심이 안 가는 그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긍정하셔도 돼요.

착각인지 아닌지, 환상인지 아닌지, 동경인지 뭔지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느껴지는대로 느껴지는 만큼 의심없이 검열없이 느끼셔도 돼요.

 

그리고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이라고 해서 

아무 여자한테나 다 끌리는 거 아녜요.

이성애자들이 저마다 사람 취향이 다 다르듯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도 마찬가지인걸요.

 

또한 레즈비언이라면

꼭 보이시해야 한다거나

보이시한 상대를 좋아해야 한다거나

예체능 방면으로 독특하고 개성있는 캐릭터여야 한다거나

그런 기준이나 조건도 존재하지 않아요.

남성혐오도 동성애자 정체성의 전제 조건이 아니고요.

 

페미닌한 사람들끼리 사귀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데요.

연애는 여자랑 하지만 친구는 남자가 더 많은 레즈비언들도 적지 않고요.

 

아, 성적 자극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받는다면 어떤 경우 무엇에 받느냐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네요.

성적 끌림을 자기 성적지향/성정체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삼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사람에 따라 달라요. 

 

성적 끌림의 여부와 방향을 성적지향/성정체성 탐색의 핵심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호감, 즉, 연애 감정 자체만으로 자기 성적지향/성정체성을 가늠하는 사람도 있어요.

 

한 가지 더 중요한 사항은

동성애자냐 양성애자냐 이성애자냐 하는 건

태어나기 전에 미리 정해지는 게 아니라는 점임니다.

정체성이란 당사자들이 저마다 살아가며 경험해 나가며 

직접 구성하는 거거든요.

 

다시 말해

동성애자라서 여자한테 끌리는 게 아니라

여자한테 끌리는 경험을 통해

성정체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 자기를 동성애자로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정체성이 먼저 오고 그에 따라 내 인생이 펼쳐지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궤적에 따라 정체성을 빚어나간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내 안의 가장 강력한 경향성,

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그걸 중심으로 본인의 성정체성을 규정하시면 되고요.

 

남자를 의식하지 않는 건 아니라 해도

주로 끌리는 게 여자라면

남자가 의식되는 거 자체가

본인한테 별로 결정적인 경험이 아니라면

동성애자로 정체화 하실 수 있는 거랍니다.

 

연애나 섹스는 여자와 하지만

성적인 판타지 자체는 이성애적인 레즈비언,

주로 이성과 사귀어 왔고

실제로 좋아해 본 특정한 동성 상대도 없으나

동성에게 끌리는 자기 경향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바이섹슈얼(양성애자),

동성과 섹스는 해도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는 건 대개 이성이라

동성과의 섹스 경험을 특별히 정체성에 반영할 필요를 못 느끼는 이성애자 등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지 몰라요.

 

ㅇㅇ 님은 어떤가요?

자기 자신이 어떤 경우에 가깝다고 생각하세요?

 

답답하니 답 좀 달라고 청하셨는데요.

상담원은 이렇게 실마리만 드릴 수 있을 뿐이에요.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

자기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성적지향/성정체성의 카테고리는 무엇인가

그 카테고리를 자기 스스로 어떻게 설명하는가는

결국 ㅇㅇ 님 몫이거든요.

 

자기 감정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자기 판단을 좀 더 믿으며

그렇게 탐색해 나가시기를 권해요.

 

양성애자라도 괜찮고 동성애자라도 괜찮아요.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괜찮고

팬픽이 이 모든 고민의 출발점이라 해도 괜찮아요.

누구와 사귀어 본 적 없다 해도, 섹스해 본 적 없다 해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할 수 있어요.

 

많이 늦은 상담글이라 언제 읽게 되실지 모르지만,

이 글을 보시고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거든

언제라도 다시 상담소 찾아 사연 나눠 주세요.

 

자기 경험을 보다 편안히 받아들이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성적지향/성정체성을 탐색해 나가실 수 있도록

안심시켜 드리고 격려해 드릴게요.

 

20151023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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