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님, 상담소에서 답변을 드려요.
남겨 주신 글로부터 지금 나는 님이 겪고 계실
괴로움과 갈등들이 전해져 왔어요.
힘든 시간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많이 좋아했고, 삼년 가량 사귄 애인이 있었다고 적어주셨네요.
삼년 여가 지날 무렵 관계에 권태가 왔는데
그 즈음 나는 님이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유학 기간 중 헤어지게 되셨고요.
관계가 권태스럽기는 했지만
완전히 끝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셨기에
관계가 정말로 마감되어 버리자
무척 당혹스럽고 힘드셨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귀국을 하셨고
헤어진 애인이 남자를 사귀는 걸 알게 되셨군요.
싸이월드를 찾아 보고서는, 출산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셨고요.
내가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이성의 상대와 교제 하고
그와 결혼 하고
또한 임신을 하는 것들,
그걸 목격하는 마음이 결코 편치 않으리라는 것
상담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답니다.
많은 이반들이
이성과의 교제 혹은 결혼을 택해 떠나가는 애인을 보며
깊은 슬픔에 빠지고 오래 힘들어 하며
또 이반으로서의 자기 자신이 갖는 입장에 대해
갑갑해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꼭 교제 중에
애인이 이제 이성애자로 살겠다고 떠나가는 경우가 아니라도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의 소식을 훗날 접했을 때
그녀가 남자를 만나고 있다거나 결혼을 했다거나
아기 엄마가 되어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곤 한다고
무수한 이반들이 그 슬픔을 털어 놓는답니다.
이 슬픔에 담긴 내용은 다양할 것 같아요.
더 이상 이반으로 살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일 수도 있고
홀로 이성애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 편안하고자 하는 그 사람에 대한
어떤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분노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이 이제 이성애자로 살아감으로써
나와 그 사람이 예전에 함께 했던 것조차
그 의미가 약화되는 듯한 느낌으로 힘겨울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으로
혼란스럽고 괴로운 것이죠.
말끔히 정리 된 관계에서도
헤어진 애인의 이성 교제에 충격받을 수 있는데
나는 님 경우는 권태기를 넘기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긴 해도
그 분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신 상태가 아니었던만큼
지금 그 분의 새로운 생활을 지켜 보시면서
더 힘드실 수 있을리라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나는 님,
우선 상대방이 나에게 더 이상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과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은
최대한 없애 나가는 게 나는 님 본인에게 좋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여전히 마음이 가는데
그 사람이 이제 나를 예전처럼 바라봐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그렇데 된 이유가
그냥 감정이 식어서건
다른 여자 친구에게 끌려서건
이성의 상대와 사귀기로 결심을 해서건 관계없이라도
일단 그 자체로 많이 슬픈 일이지만요.
돌아 선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억지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남은 사람이 아무리 붙잡아 봐도
돌아오는 건 '무관심'이거나 '불편해 하는 기색'일 확률이
정말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매달리다 보면 상대방이 내게 보이는
싫다는 듯한 기색에 거듭 상처받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내 자신이 점점 더 힘겨워지게 되어버려요.
남겨 주신 글을 쭉 읽어 보면서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나는 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요.
본인이 그렇게 원하고 있는 만큼
이제부터 차근차근 그 분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 나가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는 님이 그 분을 정리해 나가는 과정은
많이 사랑했던 연인과의 헤어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이성 결혼을 한 상대방의 현재 생활에 대한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고 견딜 수 없을 듯한 복합적인 감정이
자기 자신을 해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보듬어 나가는 과정이어야 할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에게 끌리고 여성과 교제해 온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지금 힘들어 하는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도 많이 스스로 보살피는 게
가장 중요하답니다.
상대방이 나를 떠나갔다 해도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속에 담긴
소중한 기억과 기뻤던 순간들은
영원히 그 자체로 남는 거에요.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나는 님의 마음 속에 남아
나는 님이 소중하게 꺼내 볼 수 있는
그런 경험이 되는 것이지요.
꼭 애인이었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이반이 이성의 상대를 사귀게 되면
마음이 몹시 불편해지고 서글퍼지기도 하는데요,
자꾸 그런 심정이 되더라도
스스로를 탓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만큼 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아껴주세요.
또한,
요즘들어 여러 고민 중에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까지 다시 하게 되었다고 적어주셨는데요.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인생의 어떤 시기에건 할 수 있어요.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던 중년의 여성도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레즈비언인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수 있고요,
노인이 되어서 최초로 고민을 할 수도 있어요.
지금 만일 나는 님이 '난 이제 대체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나'의 문제를
새삼 다시 고민하게 되셨다해도
이제 와서 왜 또 이럴까, 혹은
이제 와서 이래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지 않으셔도 되어요.
다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여성을 사랑했던 경험
여성과 교제했던 경험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여성간의 사랑, 여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이끌림 등은
나쁘거나 이상한게 아니라는 것 등을
잊지 않으시기만 하면 된답니다.
그리고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데
억지로 남자를 사귀어 보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만일 좋은 남자가 생긴다면 모르겠지만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도 남자를 사귀어 봐야지, 란 강박같은 건
갖지 않으셔도 정말 괜찮은 거에요.
여자로서 새 여자 친구를 만나는 것보다
남자를 사귀는 게 더 쉬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동성 교제도, 이성 교제도
인연이 닿아야 교제가 이루어지는 건
별반 다르지는 않아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내 마음의 여유 공간을 만들어 두고
여러 인연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게
필요하답니다.
나는 님, 상담소에 이렇게 글을 남겨
고민하고 계신 점을
털어 놓아 주신 걸 보면서
나는 님은 충분히 타인들과 잘 소통하며
친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분이리라 생각할 수 있었어요.
내 얘기를 털어놓고 나눌 사람이 없으면
갑갑하고 힘들지만
함께 얘기 나눌 수 있는 이반 친구들이 있으면
갑갑함이나 불안함이 한결 덜어질거에요.
그래서 상담원은 나는 님에게
레즈비언 커뮤니티 활동을 권해 드려요.
www.tgnet.co.kr 이나
www.miunet.co.kr은
한국의 많은 레즈비언들이 이용하는
포털 사이트인데요,
그 곳에 접속하시면
정말 수많은 레즈비언들이 남긴 글을 만날 수 있답니다.
채팅도 가능하고 여러 정보를 주고 받을 수도 있어요.
서두르진 않되, 차근차근 인연을 만들어 나가 보면 어떨까요?
위 사이트들에 방문도 하시고
다음daum.net에 개설되어 있는
레즈비언 친목 카페 등을 검색해서
나는 님 맘에 맞는 공간도 찾아 보시면서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조금씩 조금씩 터 나가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상담원이 드린 말씀이 나는 님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 드릴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모쪼록, 옛 애인 분으로 인해 힘겨운 마음을 잘 추슬러 나가시고
그러한 힘겨움과 관련해 새삼 찾아온 정체성에 대한 재탐색도 찬찬히 잘 해나가시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힘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이반 친구들도
차츰 만들어 나가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할게요.
그리고 상담소도 언제든 이 자리에서
나는 님이 털어놓을 고민을 들을 준비를 하고 있을 터이니
힘겹거나 외롭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꼭 다시 찾아 주세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나누어 들게요.
그럼, 나는 님, 힘 내셔요!
오늘은 상담을 이만 마칩니다.
*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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