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상담 님, 답변을 드립니다.

 

고민상담 님, 상담원입니다

공허하고 막막하고 두려운 심정이 점점 더 커진다고 호소하셨습니다. 

느끼고 계시다는 쓸쓸함과 서글픔이 너무나 절절히 다가와서

상담원도 잠시 명치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상담글을 타이핑 하면서는 숨을 아주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 중입니다.

고민상담 님도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읽어주세요.

우리 같이 충분히 숨 쉬면서 이야기 나누었으면 합니다.

 

연애를 끝낼 때마다 너무 공허하다는 말씀에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관계를 지탱해주는 아무런 제도적 안전망도 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충분한 지지나 축복마저도 없이 

오직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연인과 만나며

고달프지 않기가 과연 가능할까요.

 

소중한 사람과 함께라는 건 사실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누군가와 마음이 닿아 친밀한 인연을 맺게 되는 일이란

언제나 새삼 감동적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둘이 하는 사랑이, 둘이 맺는 관계가

두 사람한테 갖는 의미만큼 세상에도 그 무늬를 새길 수 없다면

서로를 몹시 사랑하는 연인들이라해도 

마음 한 편이 내내 허허롭지 않을까요.

 

그렇듯 애정으로 가득한 시절에도 휑한 심정에 시달리는데

헤어지는 장면에서나 이별 이후 상실을 다루는 과정이라면

그 서글픔이 더욱 깊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새롭게 누군가를 만나려 해도

어차피 똑같이 끝나고 말 거라는 생각에

지레 겁나고 허탈하고 무기력해지는 거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요.

 

고민상담 님의 공허함을 정말 깊이 공감하고 이해합니다.

 

동성 간의 교제 관계는

두 사람이 각각 혹은 같이 가지고 있는 인간 관계 안에서

두루 인정받기보다는 쉽게 고립되고는 하는데요.

 

그간 고민상담 님 사정은 어떠했을지 궁금합니다.

속사정을 알아주는 친구나 가족이 가까이 있는지 어떤지 마음이 쓰입니다.

 

사귀는 동안 관계가 고립되어 있었다면

헤어지고 나서 당사자가 느끼는 허탈감이나 상실감도 더 크기 마련입니다.

고립되지 않은 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는 정도보다 말입니다.

 

두 사람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된 이상

두 사람만이 기억하고 공유해 온 모든 순간이

흩어져버리고 지워져버리는 느낌,

그럼으로써 무의미해져버리는 느낌에

시달리기 쉬우니까요.

 

둘이서 무슨 약속을 했든 어떤 계획을 했든

그걸 촘촘히 뒷받침해 줄 제도가 거의 없다시피하므로

헤어지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합의만 되면

모든 게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끝나버리는 실정도

그러한 공허함에 큰 몫을 하고 말입니다.

 

남들이 말하는 이른바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기란

이천십육년 한국을 버텨야하는 레즈비언에게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법적으로 성별 정정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여성과

비트랜스젠더여성이 커플일 경우라면

실질적으로는 동성 관계이나

법적으로는 이성 관계이기에 

지금도 혼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동성 커플이라면

두 사람 사이에 아무리 굳게 언약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해도

법제도적으로 부부임이 인정되지 않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사회가 인정하는 관계의 틀 속에서

가정을 꾸리고 서로의 배우자로 살아가며

아이를 낳거나 입양해 기르는 삶이란

동성애자가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아닌 셈입니다.

아직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를 부정하고 그 댓가로서 이른바 평범하다 여겨지는 삶을 얻는 게

과연 스스로 행복해지는 길인지에 대해서는

정말 열심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당사자 모두가 저마다 말입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여자한테 끌리는, 여자만 좋아하는 사람인데

현실적으로 가정을 꾸려 아이를 기르려면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억지로 일부러 남자를 만나려고 노력해야 한다면

거기서 비롯되는 고통이 결코 작지 않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고민상담 님 주변에서는 

남자를 만나려는 노력이라도 해 보라고 권한다 하셨는데요.

 

상담원은 그렇게 노력하는 데 필요할 힘과 정성을

고민상담 님이 고민상담 님 모습 그대로 살면서

덜 두려워하고 덜 막막해 하도록 하는 데 쓰시면 좋겠다고

달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고민상담 님 모습을 지키며 살되

외롭고 쓸쓸하게 살지 않을 방법,

혼자 목숨을 끊고 마는 고독한 모습이 아니라

지지받는 공동체 안에서 작별인사 제대로 하고 떠나는 흐뭇한 모습으로

노년의 자기 자신을 상상할 방법,

그걸 찾아나가는 겁니다.

 

결혼 제도가 그에 뒤따르는 여러가지 법적 보장과 혜택으로

이성 배우자 관계를 체계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갈라서야 할, 갈라서고자 하는 커플을

끝내 묶어놓아주는 역할까지 하는 건 아닙니다.

마음 떠나고 몸이 돌아선 부부를 다시 사랑하게 해주지도 않고요.

 

그리고 법적인 틀이란 

때로는 버팀목이지만 많은 경우 족쇄이기도 해서

헤어져야 마땅한 이들이 채 헤어지지 못하고

억지로 부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혼 제도의 혜택을 못 받는 상황에 마냥 막막해하기보다

그러한 상황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조금 더 창의적으로 활용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 그 작업 같이 해 나가면 어떨까요.

외롭지 않게, 함께요.

 

이제까지 성소수자와 지지자들은

기존 가족 제도며 관련법이 채워주지 못하는 빈틈을

나름의 방식으로 메워왔는데요.

 

연인 관계는 다 함께 지지해주고

독신인 사람은 더 신경써서 보살펴주는

레즈비언 자조 모임 혹은 공동체를 꾸려 운영하기도 하고요.

 

아예 확장된 퀴어 가족처럼

제각기 주로 하는 역할이나 성격에 따라

엄마 이모 삼촌 할머니 등의 호칭까지 나눠 갖고

끈끈하게 지내기도 합니다.

 

경조사나 명절이면 

혈연가족/원가족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꾸린 대안가족에 마음을 기대어

따뜻하게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답니다.

 

성소수자 운동 진영 및 연대 단위들에서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에서는 

성소수자처럼 기존의 혈연, 이성부부 중심 가족 제도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 이후 벌어질 일들에 통제권을 확보하려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와 관련해

보다 효과적인 유언장 작성법을 정리해 배포했습니다.

 

링크를 열면 나타나는 게시물 하단에 

피디에프(PDF) 형식으로 자료집이 첨부돼 있으니

내려받아 내용을 살펴 보고

잘 활용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찬란한 유언장: 죽을 준비 하셨습니까?”

http://family-b.tistory.com/9

 

앞서

동성 연인의 경우

그 관계가 쉽게 고립되곤 하는 상황이 문제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그 부분을 해결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게

성소수자가 성소수자의 삶을 

함께 기록하고 기억하고 공유하는 작업 아닐까 합니다.

 

나와 너의 사랑을 우리가 같이 기억하고 

누군가 떠나면 남은 사람이 한 데 모여 애도하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시간을 틈틈이 거듭 확인하는 작업,

그걸 잘 할 수 있다면, 그 내용을 잘 축적해 갈 수만 있다면 

한 명 한 명 덜 외롭고 덜 두렵고 덜 막막하지 않을까 합니다.

 

고민상담 님, 

마음이 끌리는 사람과 사랑하세요.

이 사람 인연이다 싶을 때 교제하시고요.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는데 뭐, 라고 생각지 마시고

사랑하는 동안, 사랑하는 만큼 

관계를 지속가능한 형태로 만들 길을 찾아 보셔요.

연인과 함께 머리 맞대고 마음을 모아 두 분의 관계를 다져보셔요.

 

그리고 다른 동성 연인들에게 지혜를 나눠달라 청해 보셔요.

어떻게들 살아가는지 다른 사람들한테 노하우를 얻고

고민상담 님의 경험담도 널리 나누어 주셔요.

 

아래 링크를 눌러 여시면

미래를 구상하는 고민상담 님을 

좀 더 든든하게 해 줄 자료가 넉넉히 담긴

여러 홈페이지가 목록화 되어 있으니

하나하나 빠짐없이 방문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즐겨찾기 목록 (성소수자 관련 단체)

http://lsangdam.org/link

 

아, 아래 두 링크를 통해서도 

고민상담 님이 평소에 가지고 계셨을

궁금증이나 혼란이나 막막함을 푸는 데 도움이 될

자료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고민있어요?> (자주 묻는 질문)

http://lsangdam.org/faq

 

<여성이반, 어떻게 살아요> 자료집 

http://lsangdam.org/fileboard/158

 

성소수자 운동 진영은

성소수자의 가족구성권과 관련해

대략 세 가지 갈래로 법제도적 변화를 모색하는 중입니다.

동성혼 법제화, 다양한 가족구성권 보장, 가족 중심이 아닌 개인 중심의 권리 보장 등으로요.

각 전략이 조금씩 포인트는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안 맺는지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같습니다.

 

임신-출산이나 입양의 경우

독신 여성이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수정을 통해 임신할 길이 더 탄탄히 마련되고,

동성 배우자의 아이를 입양할 수 있도록 제도가 정비되는 등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조금씩 변화할 겁니다.

변화시켜 나가야지요.

 

한편으로는 지금 상황을 창의적으로 헤쳐 나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제도적 변화를 꿈꾸며 실천을 만들어 나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알차게 살아가는 성소수자 역할 모델을 많이 접하시면

막막함과 두려움을 조금 더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작업 혼자서 하시지 않아도 되도록

상담소가 항상 여기 버티고 있다가

고민상담 님 다시 찾아오실 때면

열심히 사연 나눌게요.

 

언제라도 

불안감에 압도되거나

우울함에 힘들 때면

대체 어쩌면 좋겠냐고 하소연 해 주셔요.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불안해지기보다

차츰 더 자신감을 많이 가지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함께 할게요.

 

혼자가 아니세요.

그걸 꼭 기억해 주셔야 해요?

 

상담원이었습니다.

 

20160414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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