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소에서 답변 드립니다.

감귤님, 남겨주신 글 잘 읽어보았어요.
먼저, 담당 상담원의 사정으로 상담이 일주일 넘게 지연된 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릴게요.
기다리시는 동안 감귤님의 고민이 더해지지는 않았다면 좋겠어요.
그럼 상담소에서 답변을 드릴게요.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려는 마음에서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부정적인 반응에 많이 놀라고 당황하신 것 같아요.
동성애자는 사람도 아니라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무엇보다 상처를 많이 받으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감귤님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전혀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왠지 부모님께 나쁜 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으셨겠어요.
글은 간결하고 담담하게 적어주셨지만 굉장히 아팠을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부모님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 모습 그대로 이해 받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해드리고 딸이 이렇게 행복하다고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도 그렇고요.
글에는 자세히 적혀있지 않지만, 감귤님이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런 마음에서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감귤님의 질문에 대해 부모님이 부정적으로 반응했을 때 더욱 충격이 크셨을 것 같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관계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인데
부모님은 그것 자체를 징그럽다고 말하시니 말이에요.
 
그런데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것은 오히려 그래서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친분이 그렇게 깊지 않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큰 어려움 없이 커밍아웃을 하는 동성애자들 중에서도,
가족에게만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말이에요.
나의 성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할 때 마음은 아파도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가족과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우니까요.
게다가 무엇보다 부모님만은 내 편이 되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데,
딸의 커밍아웃에 대해 많은 부모님들이 그렇게 따뜻한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으니까요.
부모님에게 지지 받고 싶은 마음만큼 그런 바람이 좌절되었을 때 상처가 더 깊게 느껴질 것 같아요.
서로간에 가지고 있는 기대가 크다 보니 그만큼 커밍아웃은 더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그런 맥락에서 감귤님이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은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지만,
부모님의 반응이 어쩌면 상당히 부정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꼭 말해드리고 싶어요.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관계 없이
많은 부모님들이 딸의 성정체성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곤 하니까요.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부모님이 커밍아웃 자체를 무시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묘하게 어색해진 태도에서 결코 잊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죠),
굉장히 화를 내거나 몹시 슬퍼하기도 해요.
또, 딸이 동성애자인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책하기도 하고요.
더욱 심한 경우에는 딸을 감금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고,
병원에 보내거나 종교단체에 가게 해 억지로 동성애를 ‘치료’하려고 하는 부모님도 많아요.
(동성애는 그런 식으로 ‘치료’될 수도 없고, 치료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임에도 말이에요)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경우에는 애인의 가족에게까지 연락해 아웃팅을 하는 경우도 있고요.
물론 감귤님의 부모님이 반드시 이런 식으로 반응할 것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친밀한 관계에서 더욱 극단적인 행동이 나올 수 있는 만큼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할 때에는 상당히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에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나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으니 부모님에게는 절대 커밍아웃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부모님도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딸의 성정체성을 인정하면서
네가 어떤 모습이건 간에 너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주는 부모님들도 분명 있으니까요.
그러니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날 거야.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갖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다만 만약에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감귤님이 대처할만한 방법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충분히 고려해서,
아주 신중하게 커밍아웃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본 뒤에 부모님에게는 꼭 커밍아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신다면,
감귤님이 적으신 것처럼 애인을 데리고 가서 소개시켜 드리면서 ‘저 레즈비언이에요’ 라고 직접적으로 성정체성을 알리는 것 이외에도
커밍아웃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는 점을 말해드리고 싶어요.
내 딸이 동성애자일수도 있다는 것을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듣는 것보다,
조금씩 눈치를 채고 있는 상태에서 딸의 성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은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느낌이 상당히 다를 수 있으니까요.
부모님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드리는 것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레즈비언들은 여러 가지 단서를 일부러 흘리고 다니면서 부모님이 서서히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 수 있게끔 하는 방식으로 커밍아웃을 하기도 한답니다.
이를 테면 감귤님이 하신 것처럼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동성애에 대한 주제를 꺼내면서,
나는 동성애에 대해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고, 여자랑 사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지요.
그 말에 부모님이 화들짝 놀라거나 야단을 친다면,
왜 동성애를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동성애도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인데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하는 식으로 태연하게 말해볼 수도 있겠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부모님에게 ‘동성애 바로 알기 교육’을 해드리는 효과도 덤으로 얻으면서요.
그렇게 직접적인 방법이 부담스럽다면,
동성애와 관련된 책자나 액세서리, 혹은 인터넷 사이트를 부모님이 볼 수 있게끔 ‘깜박 잊고’ 놓아 두고 가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설사 부모님이 감귤님에게 그런 것들을 발견한 것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속으로는 조금씩 단련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일 테니까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감귤님 입장에서도 여러 모로 신경이 많이 쓰일 수 있는 방법이지만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면,
여전히 부모님이 놀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라도 부모님이 실제로 느끼는 충격이 조금은 덜할 수도 있답니다.
 
동성애가 나쁜 것도 아니고, 단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부모님에게 알리는 것일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힘들고 고민이 되는 과정이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억울하고 답답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아요.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것도, 감귤님의 부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징그러운 것도 아니지요.
감귤님이 동성애자라고 해서 죄책감을 가지거나 나쁜 딸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요.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날이 정말로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동성애에 대해서 감귤님의 부모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상처를 조금 덜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겠지요.
어쩌면, 감귤님이 처음 감귤님의 성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했을 때를 생각해보시는 것이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감귤님은 별다른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정체화를 하게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상당히 많은 동성애자들은 그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는 동성애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인 편견들 속에서,
있는 힘껏 자신의 성적 지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고통스럽게 정체화를 하게 되곤 한답니다.
그 후에도 여전히 자기 안에 남아 있는 호모포비아를 깨트리려는 수많은 노력을 거친 후에야 조금 더 편안하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요.
어쩌면 감귤님의 부모님도 비슷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 역시 수많은 사회적인 편견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이미 동성애에 대해 상당히 고정된 생각을 가지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그런 편견을 가지고 살았던 시간이 더 길었던 만큼,
그 생각들을 바꾸기란 어쩌면 감귤님이 그랬던 것보다도 더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어쩌면 감귤님이 처음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스러움, 분노, 당황과도 비슷한 느낌일 지도 몰라요.
그런 부모님의 반응을 보면서 감귤님도 무척 슬프고 당혹스럽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동성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면서
‘이게 사실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이대로 괜찮구나’ 하는 식으로 감귤님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경험을 되짚어 보신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실지도 모르겠어요.
인내심을 가지고 부모님이 변화하기를 기다려 주겠다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대한다면,
어쩌면 꽤나 길어질 수도 있는 커밍아웃의 과정에서 감귤님에게 상당한 힘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감귤님이 스스로 자책하지 않으시길 바라고 있어요.
감귤님이 동성애자인 것도, 부모님에게 그것을 알리고 이해 받고 싶은 마음도, 그렇지만 부모님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전부 다 감귤님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그것만큼은 꼭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일이 더 생기거나 궁금한 점이 남아있다면 다시 상담소에 들러주세요.
그럼 오늘의 상담은 이만 마칠게요.
 
상담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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