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바보 님, 답변을 드립니다.

 

15년 바보 님, 상담원입니다.

지난 달 말 사연을 남기셨는데

이제야 답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했습니다.

 

아내 분이 

동성 연인과 혼외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밝히며

자기가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을 하면서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고 적으셨어요.

 

15년 바보 님은 

어떻게든 아내 분을 잃고 싶지 않아

부부 사이를 회복할 길이 있다면

뭐든 해 보고 싶으시고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정을 지켜낼 방법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건 무엇인지 물으셨어요.

 

간절한 심정으로 이곳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황망하고 괴로운 심정이 전해져 와서

상담원도 안타까운 마음이에요.

 

하지만 아내 분이

15년 바보 님이 전해 주신 것과 같이 의사 표현을 하셨다면

이 분은 이미 단단히 결심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홀로서기를 하겠다,

이성과의 배우자 관계를 중단하고

레즈비언으로서 살아가겠다고 말이지요.

 

자기가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남편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게 

사실상 의미 없는 일임을

솔직하게 꺼내 놓기까지,

아내 분도 고민이 깊었을 거예요.

말을 이제야 했을 뿐 오래 묵은 고민일 터이고요.

 

결혼을 한 상태에서

쉽지 않은 재탐색 과정을 거쳐

비로소 확신에 이르셨을 아내 분 뜻을 꺾기는 

아마 몹시 어려운 일일 거예요.

 

결혼을 했는데도

가정을 꾸렸는데도

이게 내가 정말 원했던 삶이 맞는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만 했다면,

그 과정을 거쳐 도달한 결론이

역시 이건 아니다, 라면

지금의 결혼 생활은

아내 분이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틀인 거예요.

 

틀어진 부부 사이를 회복하려면

둘 모두 그걸 바라야 하고

비슷한 정도의 의지를 공유해야 하고

그러한 의지는 기본적인 애정이 있어야 나오는 법인데

지금 두 분 사이에는 그게 없어요.

 

아내 분은 이혼을 요구함으로써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의사가 없음을

그런 변화는 불가능함을

뚜렷이 밝힌 셈이니까요.

 

만일

억지로 법적 부부 관계를 유지한다 해도,

최소한 형식적인 부부로 남는다 해도,

이른바 쇼윈도 부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겠지요.

15년 바보 님이 원하는 대로

서로 사랑하는 부부 사이가 되기는 어려울 거예요.

 

아내 분이 

자기 때문에 15년 바보 님 인생을 허비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셨다면서요.

마음 떠난 사람 붙잡지 말라는 요청으로 들으시면 돼요.

떠난 마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단호함으로 받아들이시면 돼요.

 

15년 바보 님이 

아무리 아내 분을 많이 사랑하셔도

관계는 한 쪽의 감정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없는 감정, 사라진 감정이란 게 강제로 길어올려지지도 않고요.

그걸 실은 15년 바보 님도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해요.

 

어떤 정신과 의사를 만나도

어떤 심리상담사를 만나도

아내 분의 성정체성을 바꾸어 줄 수는 없어요.

성정체성은 그렇게 상담이나 치료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본인이 탐색해서 결정한대로 가는 거예요.

 

15년 바보 님이 털어 놓으신 바에 따르면

두 분 관계는 신혼 초 잠시만 무난했고

그 뒤로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점점 악화되기만 했어요.

 

아내 분의 이혼 요구는

바로 그런 맥락 속에서 나온 게 아닐까요.

더 악화될 것도 없이 끝에 다다랐다는 심정이

이혼이라는 말을 꺼내게 만든 거 아닐까요.

 

15년 바보 님이 

아무리 아내 분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 해도

이제 그것만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게

없다고 봐야해요.

그게 현실적인 판단이어요.

 

서글프고 괴로우시더라도

이별이 수순임을 받아들이시는 게

가장 현명한 대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 분 모두의 앞날을 위해서 말이어요.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고

그걸 조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둘은 함께 있기보다 각자의 길을 가는 편이

훨씬 좋은 일이니까요.

 

부디

아내 분과 이야기 많이 나누시면서

이혼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들을

서로 우호적이고 정중한 태도로

협의해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궁금한 게 있거나

하소연하고 싶은 게 있거든

언제라도 다시 이곳 게시판 찾아

사연 남겨 주세요.

 

상담원이었습니다.

 

20161130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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