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답변을 드려요

님, 상담소입니다.
상담소를 방문하고 상담을 요청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님의 용기에 박수 보내드리고 싶어요.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때로는 큰 힘이 되고는 하잖아요.
이번 상담이 님에게
지지와 격려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님은 현재 동성 친구를 좋아하게 되어
마음이 복잡하다고 글을 남겨 주셨네요.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님의 감정은 단순한 우정이 아닌 것 같고,
그런 감정으로 그분을 보는 일도 창피하다고요.
그리고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고,
그분을 보통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고 싶다고 적으셨어요.

님께서는 현재 적지 않은 나이라고 하셨는데,
상담원이 정확히 님의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10대 시기는 지나온 상황인가 봐요.

아마 님과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은
제각기 일상을 살아가고 누군가를 만나고 있겠지요.
그런 주변상황 속에서
동성의 상대를 좋아하는 경험을 최초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님을 초조하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인생의 여러 가지를 배우고 결정하는 십대 시절에
정체성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하고 탐색을 거치는 것과,
이미 주위 사람들이 구체적인 계획들을 실행시켜 나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이십대나 삼십대 등에
동성의 상대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되는 것은
분명 다른 무게감일 테니 말이에요.

하지만 님.
누군가를 좋아하는 경험이나
동성의 상대에 대한 이끌림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알아가는 일은
단 번에 결정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정체성에 대해 탐색하거나
정체성을 변화,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많은 감정과 경험들을 거치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상담소에 상담을 청해오시는 분들 중에는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분들도 계시고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이러한 예들은
동성의 상대를 향한 이끌림이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나이나 주변상황을 떠나서 찾아올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 같네요.

님께서는 그분을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셨는데,
사실 상담원이 그런 방법을
정확히 제시해 드리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해요.
마음이나 감정의 문제는
누군가 정해주는 대로 바뀌는 것이 아니니까요.

사실 상담원 역시
님이 동성의 친구를 좋아하게 된 경험으로 인해
너무나 힘들어 하고 계시다는 점을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어서,
참 안타깝고 속이 상했는데요.
하지만 그 힘겨움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친구를 향한 감정을 정리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만
일단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지켜봐주는 것도 방법이죠.

상담원은 님께서 글을 통해
친구를 좋아한다는 표현보다
두렵고,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하다는 표현이
더 자주 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아마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온전치 못하다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분 앞에서도 떳떳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담원도 동감이 되어 참 안타까워요.

상담원은 이후 그분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더라도,
지금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은
그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낌으로써
자신에 대한 긍지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늘 이 상담을 통해서
최소한 님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의
첫 과정을 해나갈 수 있기를 바라요.

상담원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여자가 여자에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끼는 것,
우정이 아닌 연애 감정을 갖는 것,
돌아서면 그립고 보고 싶은 것,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실제로 사귀거나 함께 살거나 성관계 하는 것 등
모든 일들이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씀을
님에게 드리고 싶어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생기기도 하는데,
이 때 단지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의 성별이
이성이 아니라 동성일 뿐인 걸요.

물론 상담원도
왜 나는 여자친구를 좋아할까, 생각이 들어
무척 혼란스럽고 두려웠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도
정말 공감이 되어요.

좋아하는 감정, 사귀고 데이트 하기, 성관계 갖기, 함께 살기, 등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 가능하고
그렇게 이성간에서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뿌리 깊이 퍼져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동성애를 가리켜,
있을 수 없는 일, 비정상적인 것, 부자연스러운 것 등으로
취급하는 태도를 가진 이들로 가득하고요.
레즈비언들은 다 이상하고 과격하고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존재처럼 그려지고 있기도 하죠.

어릴 때부터 계속
이성간의 사랑을 낭만화하고 미화하는
매체들과 교육 내용 속에서 자라고 생활해 온 우리들 중
아무도 그런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을 거에요.
그 영향력이 너무나 강해서 말이에요.

그러다보니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자기 자신의 이끌림과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몹시 어려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님 뿐만 아니라 동성에게 이끌리는 많은 여성들이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나는 단단히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나 나나 다 똑같이 이상한 사람들이다, 는 생각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는 해요.

상담원 역시
가장 친한 친구였던 동성의 상대에게 이끌림을 가졌던 때
참 두렵고 힘이 들었어요.

하지만
동성애가 나쁜 게 아니라는 것,
그 역시 이성애와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러운 이끌림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배워가며
점점 더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은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동성의 상대에게 이끌릴 수 있는 가능성과
이성의 상대에게 이끌릴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 사회가 워낙에 이성간의 이끌림만을
유일하게 가능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다보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동성의 상대에게 이끌릴 수 있는
자기 안의 가능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당연히 이성애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살아갈 뿐인 것이고요.

그러니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것은
오히려 이성애만이 옳다고 하는 태도라고 하겠어요.
동성애라는 지극히 자연스런 이끌림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인 것이니까요.

상담원은 님께서 동성 친구를 향한 이끌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일단 그 감정을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아야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더 깊은 고민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믿어요.

현재 친구를 향한 감정을 정리하고 싶은데
그것이 어려운 상황은
그 감정을 보다 더 살펴볼 필요성을
반증하는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님 자신을 자책하지 않으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일단 그분에 대한 마음을 차근차근 살펴봐 준다면,
그리고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를 알 수 있다면
그 사랑의 감정을 정리할지 말지,
정리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수 있을지
더 잘 생각할 수 있을 거에요.

친구로 지내온 이성의 상대를 짝사랑하는 것도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요.
고백을 할지 말지,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괜히 친구 관계만 어색해지거나 깨질까 두렵죠.
누군가를 많이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 앞에서 작아지고 자신감을 잃기도 하고요.

게다가 그 상대가 동성일 때는
더욱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에 대한 자책이나
감정에 대한 부끄러움이 앞설 수 있고,
동성의 상대를 향한 고백의 문제는
커밍아웃과도 연결되어 더욱 망설여져요.

상담원은 님께서 친구와의 관계가 소중하여
고백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거나,
친구를 향한 이끌림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 마음을 정리하는 쪽으로 결정한다고 해도
님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
용기 없는 일도 아니고요.

다만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이 비정상이라거나 잘못된 거라고,
동성의 상대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고
자책하지는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중요한 건 님이
스스로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거예요.
사람은 자신을 알아가는 만큼
세상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거에요.

친구를 잊어가는 과정이 힘들다거나
반대로 짝사랑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고통스럽다거나 할 경우,
혹은 고백을 할지 말지 고민이 되거나 할 경우
언제든지 상담소이 문을 다시 두드려주세요.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럼, 이만 상담을 마칠게요.
상담원이 늘 응원하고 있을게요.
힘내세요!

-2007.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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