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mint님, 상담소입니다.
남겨주신 글 꼼꼼히 읽어보았어요.
아무에게나 쉽게 터놓지 못하는 이야기일 수 있는데,
이렇게 함께 나누게 되어 다행이고, 또 반갑습니다.
남겨주신 글로 미루어보아
이전의 성추행 피해 경험이 혹시 트라우마로 남아
지금의 고민과 연결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계신 것 같아요.
더불어, 지금 남자친구는 있지만,
여성에게는 심리적/성적으로 끌리고 있어
남들과는 다른 고민을 하는 것 같으시고요.
한편으로는
어쨌거나 여성에게 향하는 감정 역시 자연스럽게 들어서
그렇다면 내가 레즈비언인 것인가 하는 물음도 가지고 계시고요.
트라우마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렇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는
사람마다, 피해 경험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무게마다,
받은 상처를 다독이고 때로는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방식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거예요.
남성으로부터의 성폭력 피해 경험의 경우,
어떤 여성분은 모든 남성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되거나
특정 부류의(?) 남성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여성분은 겉보기에 이전과 다름없이 같이 지내기도 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전자는 트라우마에 압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후자는 트라우마가 전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요.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가부장제에 대한 거부감에
피해 경험으로 인해 더욱 커져서
남성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 행동적 거부감으로
드러나게 된 것일 수도 있고요.
한편, 거부감이 마음속으로는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나또한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져있기 때문에, 그런 사회에 반대할 수 없고
그런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성을
거부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따라서 사회에 대한, 또는 남성에 대한 거부감을
스스로 검열하고 자제하려 애쓰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도 있고요.
어떠한 경우이든,
단순히 '특정한 피해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다' 라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또한 어떠한 경우이든,
심리적/신체적 상처를 받은 경험에 대해서
트라우마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거예요.
상담원이 주절주절 이도 저도 아닌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어떠한 트라우마가 있을까, 없을까,
만약 있다면 그건 문제인데..하는 고민이
오히려 나를 더 위축되게 만든다는 것 아닐까 싶어요.
피해를 당한 것도 불쾌하고 억울한데, 그래서 어찌보면
트라우마가 나타나고 그것이 삶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당연할텐데도
트라우마를 빨리 찾아내서 없애야 하는 듯한
심리적인 압박을 받기도 하고
피해는 피해이지만 다른 남자들은 착하고, 순수하고, 배려심 있으니까
굳이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거부감을 느껴서는 안돼..하고
스스로를 검열하기도 하잖아요.
이런 검열은
아마도 우리 사회가, 트라우마를 가진 피해자를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미 많은 여성들 또한 자신도 모르게
가부장제에 익숙해져 있고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말이에요.
catmint님께서, 남성과 교제를 해 왔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트라우마가 있건, 없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만 한 것이에요.
catmint님께서 만약 스스로가 레즈비언이길 바라고
많은 여자들에게 사랑을 느낀다면
그 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요.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catmint님의
성정체성 고민에 중요한 한 부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겠죠.
사실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는 과정은
너무도 다양한 계기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특정한 어떤 경험이 catmint님을
여성에게 끌리도록 이끌었다고 말씀드리긴 어려워요.
아주 어렸을 적 부터 여성에게만 끌렸노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남성과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한 후에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알게 되는 사람도 있어요.
또한 아무리 많은 여성과 교제를 해봤더라도 10대 때의 일탈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은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한번도 교제 경험이 없지만 언젠가 누군가 좋아진다면
그건 아마도 여자가 아닐까..하고 생각해서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한 사람도 많지요.
또한 과거의 남성으로부터의 폭력, 성폭력 경험이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그런 경험 때문에
여성을 더 좋아하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레즈비언도 있어요.
catmint님 뿐 아니라 레즈비언 정체성을
고민하는 많은 여성분들도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상담소로 찾아오세요.
하지만, 가장 쉽게 생각해보면
남성을 싫어하는 마음이 어떻게 여성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게 되요.
만약, 성폭력을 당한 여성분들께서
그 때문에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끌리게 된다면
세상에 레즈비언은 아마도 넘치고 흐르지 않을까요?
많은 이성애자 여성들도
특정 피해 경험과 상관없이 남성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굳이 남성과 교제를 하지 않기도 하며
자신의 삶에 굳이 남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여성분들이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성적으로 끌리는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에 대해 갖는 편견 중의 하나가
동성애자는 그저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의 갈등이나, 불만족스러운 몇몇 경험 때문에
즉, 이성과 '제대로' 교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동성에게로 향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이러한 편견들은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성애자들은, 그저 이성을 좋아하게 되면
내가 왜 이성이 좋은가? 내가 왜 이성애자가 되고 싶은가?에
대해 굳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하지만, 동성을 좋아하게 될 때는 그렇지 않죠.
스스로도 내가 왜? 하필 왜? 동성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기도 하고
난 원래 이성애자일 수 있는데,
무언가가 원인이 되어서 동성을 좋아하고 있는 거야 하며
검열하고, 자책하기도 해요.
이러한, 이성애주의와 호모포비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상담원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상담원 스스로 끊임없이 검열하고 있을 수 있지요.
물론,
내가 어떠한 계기로 레즈비언이 되었는가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너무도 당연하고
내가 어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지
확실히 정의내리고 싶은 마음도 당연해요.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사회로부터 얻은 편견이 반영된다면 너무도 억울한 일이고
내가 누구인지 정의내리는 것 자체에 압도되어서
그동안 느껴왔던 감정 자체가 중요해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일일 거예요.
분명한 것은,
catmint님께서 어떤 이유로든지 동성에게 이끌림을 느꼈다는 것이
그러한 끌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한 사실때문에 catmint님의 감정을 부정해야하는 것 또한 아니고요.
나의 경험과 느낌, 그리고 선택이 반영된 것이라면
어떠한 정체성이든 진짜다. 대리만족이다. 이런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지요.
catmint님,
나에게 트라우마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치료해서 없애야 할 것' 은 아니고
'결핍되거나 왜곡된 마음' 은 또한 아니라는 것,
그리고 만약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나타나지 않았을 마음인데
트라우마로 인해 드러나고 확장된 마음이라고 해서
그런 마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지는 않아도 돼요.
아마, 그럴 수도 없을 거예요.
catmint님께서 느끼고 계신
여성에 대한 감정과 여성들과 맺는 다양한 관계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소중해요.
catmint님,
정체성은 단시간에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니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갖으시고
그렇게 이런 저런 경험, 생각이 많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저 어디 중간쯤 있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맘 편히 받아들일 수도 있게 되기도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제 답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고민이 계속되면 그 때 다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내시고,
이야기 나누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상담소 드림.
2010-05-77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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