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님, 답변을 드립니다.

 

카오스 님, 답변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간 어떻게 마음을 돌보아 오셨어요.

워낙 스스로를 잘 보살피는 타입임에도

이번에는 그럴 의지마저 놓아버릴 정도로 

너무나 많이 힘겹다 적으셨지요. 

그러다보니 몸까지 많이 상하셨다고요.

몸이 마음을 읽고 같이 앓는구나 짐작해 보아요.

계속 그러시면 어쩌나 염려되고요.

 

후배가 연애를 시작함으로써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카오스 님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도 고통스럽지만,

후배가 새로 시작하는 사랑을

온전히 축복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 역시

견디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라 호소하셨는데요.

 

상담원은 카오스 님께 무엇보다도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말씀을 

힘주어 드리고 싶어요.

 

기회가 남아있는지 없어졌는지와 무관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애써 접지 않으셔도 괜찮고,

축하할 마음이 안 생기는 일을 응원하려고

일부러 공들이지 않으셔도 괜찮다고 말이지요.

 

좋아하는 상대에게

내 감정을 집요하게 강요하지만 않으면 돼요.

내 몫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멋대로 얹어놓지만 않으면 돼요.

그만큼의 배려와 예의만 갖출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줄곧 마음을 품고 있는다는 거 자체가

잘못일 수는 없어요.

없고 말고요.

 

이는 

상대방이 갓 연애를 시작했든

배우자와 가정을 꾸렸든 

독신으로 살아가고 있든

마찬가지랍니다.

 

내 쪽에서 상대방에게 뭘 바라거나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간직하고 들여다보는 거죠.

얼마든 그럴 수 있고 그래도 되는 일이어요.

말그대로 “내 마음”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교제한다는 건

너무나 서글프고 괴롭고 아픈 일 맞지 않나요.

충분히 슬픔을 슬픔만으로 겪으셔도 돼요.

질투심이 끓어오른다면 그 역시 뜨겁게 겪으셔도 되고요.

 

그 모습 보기 힘들다고

스스로를 옹졸하게 느끼지 않으셔도 돼요.

방해꾼으로 여기지 않으셔도 돼요.

옹졸하신 거 아니고 방해꾼도 아니세요.

 

카오스 님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사랑의 상대가 다른 사람을 만나요.

아무리 짝사랑이었다 하더라도

카오스 님은 실연을 하신 거죠.

짝사랑이어서 어쩌면 더 가슴 아픈 실연이고요.

 

여기서 잃어버린 건

일말의 기대나 희망일 수도 있고

상대방 얼굴을 편안하게 마주할 시간일 수도 있고

질투나 시기 없이 온전히 설렘으로만 가득했던 마음일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잃었다는 사실이에요.

잃었다.

뭔가가 사라졌다.

이제 없다.

 

휑하고 허전하죠.

그런 쓸쓸함과 씁쓸함을 

스스로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상실을 기려주는 거예요.

애도하는 거예요.

깊이 슬퍼하셔도 된답니다.

 

상대방을 전적으로 축복하는 일이

카오스 님 자신의 슬픔과 괴로움을 

지우고 외면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면요.

 

저는 카오스 님에게

담담하고 관대한 사람이 되기보다

슬픔과 괴로움에 천착하는 아픈 사람이 되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어요.

 

부럽고

슬프고

화나고

막막하고

처절한 마음,

잘못된 거 아니에요, 카오스 님.

 

그러니까 축하가 안 되면 안 하셔도 되고

응원할 마음이 안 우러나면 안 하셔도 돼요.

그런 마음이 안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거지

카오스 님의 내면이 비좁아서가 아니에요.

그걸 꼭 기억해 주셔요.

 

마음이 아리고 먹먹한 느낌이 든다면

그럴만 해서 그런 거니까

통증에 집중해 줘야 한다는 거 역시

꼭꼭 기억해 주시고요.

 

후배 분이 연애를 시작하기 전과 같이

얼굴 보며 지내기가 지금 당장은 힘들다면

당분간만이라도 좀 드문드문 만날 수 있도록 

사정을 둘러댈 길을 찾아보셔도 좋겠어요.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 핑계로요.

 

카오스 님이 필요하다 싶은 만큼 시간을 가지세요.

마음이 어느 정도 아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후배를 보다 편안히 대하게 될 거예요.

본인이 변화한 모습에 이제 좀 괜찮은가보다 

하고 깨달으실 거고요.

 

그리고 

나중에 카오스 님이 마음을 전하게 될 때

후배가 겪고 감당해야 할 마음의 몫은 

고스란히 후배의 몫으로 남겨두셔요.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와의 관계로부터 무엇을 얻고 어떤 걸 배울지나

동성에게 고백을 받을 경우 그 상황을 어떻게 다룰지나

다 후배가 직접 고민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천할 문제니까요.

 

연애 경험이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동성의 상대

자기가 애정을 품어왔던 바로 그 동성의 상대가

자기한테 가까이 다가온다면

후배든 (그 누구든) 바로 그 상대방과의 교제를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이제까지 성정체성 탐색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성과의 교제를 첫 연애로 경험하며

그걸 계기로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알아볼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이성 교제를 해 봐야만

그것에 견줌으로써만

동성 교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동성애를 통해 

연애 경험의 첫 단추를 끼우는 거,

전혀 무리 아니랍니다.

 

이후 이어질 다른 교제 관계의

원형같은 관계가 

동성과 맺은 첫 연애 관계여도

괜찮은 거랍니다.

 

이성과만 교제할지

동성도 만나볼지

다른 동성한테는 관심없지만

특정한 동성이라면 충분히 고려해 볼 여지가 있는지 

아니면 앞으로는 동성만 만날지 등에 대한 생각은 

모두 후배가 직접 할 고민이에요.

 

카오스 님이

앞질러 고민해 주시지 않아도 돼요.

그런 책임은 지지 않으셔도 돼요.

 

카오스 님은

본인 감정에 솔직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긍정하며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거,

그거에만 마음을 쓰셔요.

 

카오스 님 스스로 감당가능한 만큼씩

조금씩 찬찬히 후배를 만나가시고요.

 

이후 고백할 기회가 찾아오면,

혹은 그럴 기회를 직접 만드시게 되면,

미안해 하시거나 움츠러 드시지 말고

당당하셨으면 해요.

 

상대가 기꺼이 받아들여 준다면

두 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갈 터이고

거절한다면 

두 사람이 같이 사랑하게 되리라는 희망은

사라지겠지요.

 

좋아하는 마음을 단박에 정리하시지는 못하더라도

사귈 수 있을 거란 기대만은

깨끗이 단념하셔야 할 거고요.

 

좋아하는 사람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속을 끓이실 시간 동안에나

나중에 언젠가 고백을 본격적으로 준비하실 때나

상담원이 같이 고민해 드릴 터이니

언제라도 다시 오셔요.

 

견디는 괴로움,

준비하는 두근거림,

이루어졌을 때의 행복이나

무너졌을 때의 절망,

하나하나 다 나누며

든든히 버텨 드릴게요.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너무나 소중한 일임을

늘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며,

오늘 답변은 이만 줄입니다.

 

20160915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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