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다니 님, 답변을 드립니다.

 

단다니 님, 상담원입니다.

지난 달 초순에 글을 남기셨는데

벌써 새 달 중순이 되어버렸습니다.

답변을 너무 오래 기다리시도록 했죠?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전하면서 상담글 이어나가겠습니다.

 

적어 남기신 글은 곰곰이 읽어 보았습니다.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서 

이 글을 남기신 것 같아요.

 

여자한테도 관심이 가고 남자도 좋고

딱히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는 것 같을 때도 있고

마음이 그렇게 왔다갔다 복잡하다보니

본인이 과연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아니면 무성애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며 

갑갑한 심정을 꺼내 놓으셨네요.

 

오죽 답답하셨으면

과연 본인의 성정체성은 무엇일까

상담원에게 질문해 오셨을까 싶어

먼저 이렇게 말로나마 다독다독 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대체 모르겠으니 제발 누군가가 대신 말해줬음 싶은 그 마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말이지요 단다니 님,

내가 동성애자냐 양성애자냐 이성애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질문을 떠올린 당사자가 스스로 찾아나가야 하는 거랍니다.

당사자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몹시 다양한 계기들을 통해

각기 다른 인생의 시점에

자기 성정체성을 탐색하거나 

재탐색하고는 한답니다.

 

가령

누군가가 정말 좋아져서 

그 일을 계기로 자기 성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게 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특정인에게 관심이 가서라기보다

자기가 느끼는 전반적인 이끌림의 방향을 살펴

그에 따라 자기 성정체성 알아 나가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다른 한편

주변 사람들이 맺는 관계나 본인이 접하는 각종 매체에 영향을 받아

이제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가능성을 떠올리며

새롭게 성정체성 고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지요.

 

십대 시절 이 고민으로 밤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이미 제도적으로 결혼까지 하고 오래 혼인 생활을 하던 중에

난생 처음으로 이 고민을 끌어안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왜, 언제, 몇 살 즈음 

자기 성정체성을 탐색하고 규정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누구를 좋아해 본 경험

사귀어 본 경험

성적인 관계를 가져 본 경험

같이 살아 본 경험 등의

여부에 대해

각자가 직접 해석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에요.

 

예를 들어

이성과 무수히 사귀어 보고 그들을 정말 좋아도 했지만

이 사람이 내 인생의 사람이다 싶은 동성의 애인을 만나

그 시점 이후로 스스로를 동성애자라 정체화 하는 사람, 많아요

 

다른 한편

이성에 대한 끌림과

동성에 대한 끌림이

자기에게 그 정도의 차이 없이

다 중요한 경험이다 싶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양성애자로 정체화 하고는 하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성별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는 까닭으로

스스로를 무성애자라 생각하는 한편

또 다른 사람들은

성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 전반을 통틀어

자기는 누구에게도 마음이 가지 않는다

특별히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무성애자라 이름붙이기도 해요.

 

말하자면,

정체성 범주들에 대한 이해도 

자기 경험에 대한 해석도

다양할 수 있다는 거예요.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해도

누군가는 그 경험을 토대로 자길 양성애자라 하고

누군가는 그 경험을 토대로 자길 동성애자라 할 수 있고

그 각각의 자기 규정은

그 자체로 존중돼야 마땅하답니다.

 

그러니 어떻게 남이, 제삼자가 그 작업을 대신해 줄 수 있겠어요.

 

상담원 역시 

아무리 그간 정체성 고민의 사연들을 무수히 접해 왔다 해도

단다니 님에게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다, 저런 사람입니다

결론짓듯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지금 가지고 계신 질문은

단다니 님 스스로 풀어나가셔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느끼는 감정들, 욕망들

하나하나 다 있는 그대로 긍정해 줘도 된다는 거

그 사실을 기억하시는 거예요.

 

동성만 좋아도 되고

이성만 좋아도 되고

둘 다 좋아도 되고

아무도 안 좋아도 돼요.

 

다 괜찮습니다.

이상한 경우란 건 없어요.

꼭 어떠해야지만 정상이고 옳다는 법도 없어요.

 

그리고

왜, 무슨 영향으로 동성에게 끌리게 되었는지

즉, 동성을 좋아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도 상관없어요.

팬픽 때문이라도 괜찮고 만화 때문이라도 괜찮아요.

동성이 좋다는 사실 자체에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이 꼭 누군가를 좋아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상대가 이성이어야만 정상인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상대가 꼭 한 쪽 성별에만 국한돼야 하는 것도 아녜요.

 

마음 가는대로 좋아하고

안 내키면 안 내키는대로 피하고

그러면 됩니다.

 

일단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나는 누가 좋고 누가 별로인지

이런 나 자신의 감정들을 소중히 해 주세요.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거나 질타하지 말고

어떤 순간에도 너그럽게 봐 주며 여유를 가지세요.

 

그런 과정에서

내가 주로 끌리는 성별의 사람은 누군지

내가 누굴 정말 좋아하기는 하는지 등에 대해

차츰 더 분명히 알아가게 되시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 싶은

성정체성의 범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조금씩 더 확신이 생길 테고요.

 

상담원은 단다니 님 그 고민의 과정 함께 하며

계속 응원해 드리고 싶어요.

 

앞으로도 질문이 있거나 마음 복잡하거나 할 때면

언제든 다시 이곳에 글 남겨 주세요.

 

다음 번에는 이렇게 한달 넘게 기다리시도록 하지 않을게요.

열여섯 살의 봄날, 하루하루 근사하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친구들하고는 얘기 안 통할 것 같은데

할 얘기는 많아서 막 속 터질 때

그럴 때 혼자라 생각말고

여기 오시는 거예요. 알죠?

 

그럼 오늘은 이만 글을 맺겠습니다.

 

용기를 전하며,

상담원이었습니다. 

 

201403H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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