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포의서재 2026 흩어지기-모이기] 정신 놓은 토크클럽 후기

지난 7월 25일 오후 2시,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한국레즈비언상담소 문화기획팀 사포의서재의 정신건강 패널토크 〈정신 놓은 토크클럽: 마스킹과 일코로 지친 당사자와 주변인을 위한 정신건강 패널 토크> 이 열렸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활동가, 창작자가 한자리에 모여 여성 퀴어의 정신건강과 관계, 돌봄, 커뮤니티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토크클럽은 누구나 안심하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눌 수 있도록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외부 공유를 제한하는 비공개 원칙을 안내하고, 촬영을 원하지 않는 참여자를 위한 스티커를 준비했으며,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릴렉스 존과 스태프 지원 체계를 마련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마음의 안정을 위한 말랑이(스트레스볼)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각자의 속도에 맞춰 편안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작은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챙긴 자리였습니다.


첫 번째 발제는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상담팀 활동가 산들님이 맡았습니다. <여성 퀴어 상담의 의미와 실천>이라는 주제로, 상담소 상담팀과 상담활동가의 역할을 소개하고, 2005년 재모집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온 상담팀의 활동과 상담 프로그램, 상담 이용 현황을 공유하며 여성 퀴어들이 안전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연결될 수 있는 상담의 의미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두 번째 발제는 살림의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희성 원장님이 맡아주셨습니다.

소희성 원장님은 ‘건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건강은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함께 안녕한 상태이며, 개인의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을 짚어주셨습니다.

특히 성소수자의 정신건강을 이야기하며, 우울과 자살사고의 높은 비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낙인과 차별, 배제와 고립이 만들어낸 ‘소수자 스트레스’의 결과​임을 설명해주셨습니다. “건강 관리를 못한 것이 내 탓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이 함께 작용한다”는 말은 많은 참여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발제의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한 의료는 결국 모두를 위한 의료’​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성소수자 친화적인 의료와 공동체 돌봄, 그리고 차별 없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곧 모두의 건강을 위한 길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개인의 회복을 넘어,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발제는 펭귄의 날갯짓박지선 활동가님이 함께했습니다.
박지선 활동가님은 정신질환과 고립을 경험하는 청년들이 서로 만나며 함께 회복의 여정을 건너가고자 하는 ‘펭귄의 날갯짓’ 활동을 공유했습니다. 특히 ‘회복 밥상’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장을 보고 요리하며 둘러앉아 식사하는 시간을 통해, 회복은 자기 돌봄을 배워가고 관계 맺는 과정에서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주간동료지원쉼터 ‘친구네 집’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소개했습니다.

발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건강한 집밥’조차 개인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고시원 생활로 냉장고를 마음껏 사용할 수 없고, 공용 주방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현실은 주거 환경이 건강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또한, 식사 예절, 역할 분담, 뒷정리 등 경험치와 기준이 다른 것에서 생긴 불편함과 서툴렀던 장면들을 공유해 주셨습니다.‘당연히 ~해야지’라기 생각보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마음으로 서로 배우고 조율해가는 과정을 통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손 씻기부터 함께 배우는 회복 밥상 이야기”​는 많은 참여자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용기와 도움이 필요한 과정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겪어내는 것이야말로 돌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발제는 하미나 작가님이 함께했습니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이야기는 ‘베를린의 나무와 서울의 나무’​였습니다. 공원 한가운데에서 마음껏 뻗어 자란 베를린의 나무와, 좁은 도로와 보도블록 사이에서 수백 년을 버텨온 서울의 나무. 같은 나무라도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에 아름다움의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많은 참여자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베를린에서 보는 나무의 기준으로 서울의 나무를 판단할 수 없다.”

하미나 작가님은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모양으로 살아남은 나무를 이야기하며, 우리 역시 각자의 삶 속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텨온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휘어지고 상처 입었지만, 바로 그 시간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어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쓰게 되는 ‘마스킹’과 이중 메시지, 그리고 ‘나를 살리는 이야기와 나를 죽이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타인이 규정한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말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일이 결국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참여자들 역시 “견딤 자체가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위로를 받았다”, “우리도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온 존재라는 걸 느꼈다”는 후기를 남겨주었습니다. 나무를 통해 삶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선은 토크클럽을 마친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 2부 패널 토크에서는

Q1. 커뮤니티 안에서 정신질환 낙인이 존재하는 이유
정상성에서 벗어난 지점(학벌, 경제력, 가정환경 등)이 관계에서 일종의 평가 기준처럼 작동하는 현실이 지적되었습니다. 힘든 상황일수록 자원을 가진 곳에 위계가 생기는 것 아니냐는 의견과 함께, 이는 이성애 사회의 결혼 관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차별받는 집단 안에서도 돈, 매력, 성적지향, 네트워크 등 다양한 힘의 차이로 인해 또 다른 차별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한 제도적·개인적 윤리 장치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Q2. 정신질환 내에서도 위계가 존재하는가
ADHD로 병원을 찾지만 실제로는 우울이나 과중한 업무 부담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는 임상 경험이 공유되었고, 조현병에 대한 낙인이 특히 크다는 점에 모두 공감했습니다. 진단명은 해방감과 적절한 치료로 이어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문제를 병리적으로만 해석하게 만들어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릴 위험도 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진단을 받고 처음엔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 경험이 담담해지고 오히려 자신을 이해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개인적 경험도 나눠졌습니다.

Q3. 낙인이 고립으로 이어지는 현상
진단명은 결국 당사자의 고통을 줄이고 사회적 자원이 투입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약물 치료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을 풀어내고 연결될 수 있는 삶의 형태가 있으며, 특히 조현병 진단을 받은 경우 약 복용을 둘러싼 정체성 혼란과 보호자와의 갈등이 발생하기 쉽다는 점도 짚어졌습니다. 결국 의료의 중심에는 개개인이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Q4. 퀴어 내 교제폭력과 이중 고립
퀴어 관계 내 폭력은 신고 시 정체성이 노출될 위험이 있고, 사회적 전제(이성 관계로 가정하는 시선) 때문에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더 큰 고통을 동반한다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호모포빅한 사회에서는 관계가 폐쇄적일 수밖에 없어 연인이 유일한 안식처가 되기 쉽고, 이는 누구든 쉽게 고립되고 폭력적인 관계에 놓일 수 있는 구조적 문제로 이어진다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Q5. 교차된 취약성 (학력·주거·노동·퀴어·지역·젠더)
관계를 숨겨야 하는 상황 자체가 폭력에 대한 취약성을 높인다고 짚었습니다. 임신중절이 비범죄화되었다고 해서 관련 어려움이 사라지지 않듯, 가시화되지 못하고 숨어야 하는 위치에 놓인 이들—특히 퀴어—은 구조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의 입장을 헤아리게 되는 심리적 딜레마도 짚으며 이 자체가 고통스러운 지점임을 이야기 나눴습니다.

Q6. 관계 내에서의 돌봄과 커뮤니티
소수의 밀접한 관계보다 다수와 느슨하게 연결된 글쓰기 모임 같은 구조가 돌봄의 부담을 분산시키고, 되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관계가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경험이 공유되었습니다.

(추가) 돌봄으로 소진될 때 경계 긋는 법
‘회복 밥상’ 프로그램에서는 참여자 한 명 한 명과 1:1로 소통하며 개인에 대해 더 알아갔다고 합니다. 또 정신질환과 고립의 경험으로 타인의 비언어적 신호나 분위기를 잘 읽지 못해 같은 안내를 반복해야 했던 상황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서로 알아가고 ‘함께 배우는 과정’, ‘관계를 견디는 힘’이라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Q7. ‘미쳤다’를 재정의해보자
정신의학은 결국 포장된 형태의 돌봄이며,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묻는 작업이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아픔은 결국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그 서사가 단절될 때 발생하며, 특히 조현병 당사자들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다가가고 함께할 수 있을지가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돌봄이라는 일의 이면에 존재하는 고단함(감정의 배출구가 되어주는 경험 등)도 솔직하게 나눠졌으며, 그 과정에서 과거의 자신을 다시 마주하고 이해하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 3부 청중과 함께한 이야기 (Q&A)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참여자분들이 미리 보내주신 질문과 현장에서 나눠주신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각자의 삶에서 길어 올린 솔직한 질문들 덕분에, 패널분들과 참여자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배우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 중 핵심적인 주제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나눈 이야기들

나의 마음을 돌본다는 것
퀴어로서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패널들은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여유, 그리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감각이 큰 힘이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가면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상황에 따라 ‘사회적 얼굴’을 바꾸는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일종의 놀이처럼 가볍게 받아들여 볼 수도 있다는 시선이 인상 깊었습니다.

안전한 관계, 그 선을 그리는 법
퀴어 관계 안에서 폭력과 갈등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고민에 대해, 성별과 관계없이 폭력적인 행동은 폭력이라는 점, 그리고 안전한 관계는 서로 선을 명확히 표현하는 경험을 통해 함께 배워가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우리가 받았던 돌봄들
직접적인 해결보다 곁에서 꾸준히 안부를 물어봐 준 사람, 위기의 순간 발 벗고 나서준 친구들, 조용히 존재를 지켜봐 준 관계처럼 — 각자가 경험한 소중한 돌봄의 순간들이 따뜻하게 공유되었습니다.

지치지 않고 나아가기 위한 자원들
일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순간에는, 정신건강복지센터나 행정복지센터의 돌봄 지원 서비스와 같은 지역사회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또한 스스로의 작은 성취를 기록하며 자신을 다독이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마주하는 법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감정인 수치심과 죄책감. 이를 글로 써내려가며 거리를 두어 보는 방법, 혹은 건강한 방식으로 마음껏 표출해보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작을 지나온 이들에게
불리한 환경에서 출발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불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더디더라도 내가 원하는 모습과 환경을 계속 상상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응원이 전해졌습니다.

‘정상’이라는 기준, 그리고 진단과 치료를 둘러싼 고민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에 대한 질문, 약물치료를 둘러싼 개인적 고민들에 대해 — 문제를 개인에게만 돌리지 않고 사회 전체를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점, 그리고 당사자의 목소리야말로 사회를 향한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깊이 있게 다뤄졌습니다.

‘장애’라는 언어에 대하여
정신장애라는 용어를 둘러싼 다양한 시각(의료적 모델, 사회적 모델, 인권 모델)이 소개되었고, 언어가 가진 힘과 정치성, 그리고 그 언어가 다시 낙인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참여자 후기💛

함께 시사하다

환상적인 내용은 못 적겠지만, ㅎㅎ 오늘은 시사성에 대한 기억이 남습니다.

첫째로 정신건강의 의제가 사회적, 개인적 일상에 밀접한 관계로 다가와 있다는 점. 둘째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서사함으로 관계를 맺어간다는 점.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는 주제는 아니었으나 자리에서 나누었던 다양한 이야기가 누군가의 시사성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네요.

각자의 자리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 또한 연결되어 또 다른 연결을 만드는 사람들을 통해 연대의 시간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짧은 시간 여러 가지 주제를 다뤄주셔서 고맙습니다.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열리면 좋겠네요

초대해주셔서 혼자 이생각 저생각해 보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을 살고 싶네요! 사자처럼, 고양이처럼~ 저는 끊임없이 검열하고 비난하려는 저와 대치 중이여서,적은 에너지를 갖고서 오늘 배우고 지평을 넓히는 시간으로 집중하다보니.. 지선의 명대사를 듣고 휙 지나가버려 놓친 것들. 이 많습니다.. 좀 미안해지네요. 제가 더 단단해지는 것으로 보내주신 마음에 보답해볼게요 ㅠㅠ (쓰레기방 치워준 세 친구.. 겁나 부럽.. ㅎㅎ)”

“오늘 사람들의 말에(여러 사람들) 울컥했다. 울림이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크레이지’함을 (배우자)언제 말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었다. 이런 자리 너무 소중했다.”

정신 놓은 당신을 놓지 않을 거예요 – <정신 놓은 토크클럽>을 기획하고 진행하며

글 | 백범 (사포의 서재)

조울증 2년 차 정병 덕후로서 한국레즈비언상담소 ‘사포의 서재’에서 기획한 흩어지기-모이기 <정신 놓은 토크클럽>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었다. 나는 외로웠다. 늘 말할 곳이 필요했다. 공감하고 연대할 사람이 필요했다. 제발 이것에 관해 같이 이야기 나눴으면 했다.

퀴어 여성 정신장애인. 이 교차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자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퀴어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여성 퀴어로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하는 경험이 있다. 미친 여자에게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인지하는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세상은 좀 암울하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받고 있어도 외롭고 응답이 돌아오지 않아 벽에다 대고 말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우리가 기획한 이 자리가 답이 될 수 없고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도 없지만 어떤 장이 될 수는 있었다. 장이라는 건 모인다는 것이고 모이면 힘이 생기고 가시화가 된다. 당사자나 그의 주변인 같은 사람들이 한데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겠다고 말하는 건 이 시대를 과소평가하는 것일까. 다소 비관적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이렇게 말할 만한 세상인 것 같다. 미친 여자에 관해서는 더 말해져야 한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라는 이름 아래에서 40명 규모의 패널토크를 기획하고 진행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이런 것일 거다. 어딘가에 계시나요? 우리는 당신이 보고 싶고 궁금합니다. 잘 지내시나요? 어떻게 지내시나요? 우리 같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요. 우리도 그런 사람 중 하나라서 이렇게 모여있거든요. 괜찮으시면 오셔서 함께 존재한다는 감각을 느껴보시겠어요?

살림의원 정신과 전문의 소희성 선생님, ‘펭귄의 날개짓’ 박지선 활동가, 하미나 작가가 각자가 가진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정신과 전문의와 활동가와 작가가 각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다채롭고 풍성한 이야기가 되었다. 서로의 이야기가 교차되고 연결되는 지점도 있었다.

그중 하미나 작가의 글쓰기에 관한 말이 공감되었다. 많은 여자는 참기와 침묵하기에 능하다. 왜 우리는 그것에 능한가. 능할 수밖에 없는가. 이 진실 자체가 분하다. 나는 왜?라는 질문을 잘하던 여자애였다.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고 분노하고 욕하며 감정을 서툴게 표현했다. 그러다 중학생 때 친구가 “너랑 있으면 우울해져”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충격이었다. 이건 잘못된 거구나. 우울과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은 버림받는구나. 그때부터 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니 사람들의 반응이 바뀌었다. 난 여전히 의문과 분노를 표현하는데 방식이 달라지니 사람들이 멋있다고 했다. 분노하는 여자는 멋있는 거구나. 나는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에게 쓰기의 원동력은 분노였다. 분노는 무기력과 슬픔으로 바뀌었고 나는 미치고 슬픈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모든 여자는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직업인으로서 작가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글은 여자가 쓰는 거라고 배웠다. 글 안에서 우리는 권력자가 된다. 우리네 삶은 글을 쓰면서 무기가 된다. 우리는 퀴어 혹은 정신병자로 낙인찍히고 사회적으로 혹은 스스로 피해자 위치에 서게 된다. 낙인화된 꼬리표를 전복해 우리만의 언어를 만들고, 피해자에서 가해자의 위치로 가본다면 어떨까. 그럴 때 비로소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관계에서 탈피해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패널분들의 발제와 패널토크가 끝나고 오신 분들의 질문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사전에 남겨주신 질문들이 꽤 많고 길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다들 이렇게 많고 긴 고민을 가지고 있었구나. 말할 곳이 필요했구나. 이렇게 질문을 쓴 것 또한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사전에 써주신 질문이든 현장에서 나눠주신 질문이든 어떤 방식으로 나눠 주신다는 게 반가웠다. 질문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자리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했다. 한편으로는 이곳에 올 수 없는 이들을 헤아렸다. 정병 때문에 정병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올 수 없는 사람들. 신청을 망설이거나 지각하거나 노쇼하는 사람들. 자막이나 수어통역이나 음성해설이나 안내보행이 필요한 사람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떠올리니 미안해졌다. 어떤 행사와 마찬가지로 완벽할 수 없는 미진한 행사여서 어느 면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더 만나고 싶다. 만나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 자리가 그런 자리가 될 수 있어서 기쁘다. 어떤 가능성을 열어준 장이었다. 올 수 없었던 사람들까지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이번 토크클럽에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용기 내어 질문을 나눠주신 참여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한국레즈비언상담소는 더 많은 분들과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가겠습니다. 💛

기획
사포의서재
쿠, 체리, 현토, 백범, 요다, 한알, 채원, 영원

진행(모더레이터)
현토(사포의서재), 히히(상담팀)

발제
산들(상담팀)
박지선 | 정신질환 및 고립 당사자 청년들과 동행하는 단체 ‘펭귄의 날갯짓’ 대외협력팀 활동가
소희성 | 살림의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하미나 |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작가

현장 운영
수달, Joe, 채원, 요다, 쿠, 백범, 현토, 산들, 히히, 로운

참여자 응대·데스크
수달

아카이빙
사진 | 백범
녹취 | 쿠
속기 | 요다
홍보 | 채원

디자인
체리

공간 협조
강북노동자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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