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운 겨울부터 따스한 봄까지, 광장에서,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윤석열 없는 세상!”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는 4월 28일부터 5월 6일까지 회원 분들을 대상으로 구글폼을 통해 집회 참가기를 모집했습니다. 총 4분의 회원 분들이 소중한 응답을 보내주셨어요.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누구와 함께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가장 힘들었던 순간, 가장 벅찼던 순간은요?”
비상계엄부터 파면선고까지, 우리들의 기억, 감정, 느낌, 경험을 우리의 목소리로 전해요. 5월 19일 저녁에 1편, 6월 2일 저녁에 2편이 올라갑니다.
1편에서는 계엄 당시의 기억과 첫 집회 경험을 중심으로 우리가 왜 광장에 나서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요. 2편에서는 좋았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 희망과 고통이 뒤섞였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파면의 순간을 함께했고 이후의 사회를 상상했는지 전합니다. 회원들이 직접 보내준 사진과 함께, 생생한 경험을 함께 살펴보아요!
1편: 그날, 우리는 광장에 있었다.
“ …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작년 12월 3일 10시 28분, 비상계엄이 선포된 그 순간, 우리는 뉴스를 통해, 트위터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통해 비상 상황을 마주했습니다. 누군가는 라디오를 들으며 무력감 속에 밤을 지새웠고, 누군가는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갈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혼자서 국회로 향한 이도 있었고, 애인과 손을 잡고 집회에 참여한 이도 있었습니다.

사진 1: 김권 제공
Q1. 참가했던 집회를 모두 알려주세요.
김권: 2024년 12월 7일 서울 여의도, 2024년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2024년 12월 22일 서울 남태령, 2025년 1월 4일 서울 한강진역
우연: 2024년 12월 7일 서울 여의도, 2024년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2024년 12월 22일 서울 남태령, 2025년 1월 4일 서울 한강진역
루니: 2024년 12월 14일 집회 (국회의사당), 2025년 3월 15일 집회 (종로 안국역)
소연: 12월 6일 여의도, 국회에서 탄핵안 투표불성립되던 7일 여의도, 가결되었던 14일 여의도 ··· 한강진에도 있었고 광화문에도 있었고, 경복궁에도 있었고··· 남태령에 없었어서 너무 아쉽습니다.
Q2. 계엄 선포 당시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김권: 계엄이 선포되는 것을 광주에서 지켜봤습니다. 당장 서울에 있는 여자친구 걱정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계엄령이 내리면 지역 간 이동이 봉쇄될 가능성이 높고 북한과 전쟁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광주에서 나가서 서울로 가서 혼자 있는 여자친구를 데리고 올 수 있을지 걱정됐습니다.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가족들과 함께 남쪽 섬으로 피신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자친구에게 국회로 절대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여자친구가 계엄군에게 죽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연: 집에서 항상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인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면서 트위터(현 X)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뉴스앱에서 온 계엄선포 알림을 보게 되었어요. 계속 트위터를 보면서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나는 운전면허가 없는데 어떻게 대피해야하지, 본가로 가야할까, 이후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두려움이 가득했어요. 라디오 프로그램이 끝날 시간인 자정이 되어도 계엄해제가 되었다는 얘기가 없었고, 디제이가 내일 방송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마무리를 했던게 기억납니다. 이후 국회에서 계엄 해제안이 가결될때까지 깨어있다가 잤습니다.
루니: 애인과 누워서 티비 보다가 우연히 인스타그램 들어가서 관련 글을 보고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연: 저는 상담소의 상근활동가인데요. 상담소 30주년 전시 텀블벅 리워드 발송을 모두 마치고,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애인과 함께 늦은 밤 귀가하던 차였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가 아마 밤 열시가 조금 넘었던 것 같아요. 씻기도 전에 소파에 드러누웠는데, 언니로부터 카톡이 와있었습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고요. 처음에는 가짜뉴스인 줄 알았는데, 애인이 트위터를 좀 빨리 보라고 했어요. 그때서야 진짜라는 걸 알았고, 뉴스를 틀었을 때는 이제 막 포고령이 나오고 있었던 것 같아요. 현실성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할 줄 몰랐고, 계속 뉴스 속보만 보고 있었습니다. 애인에게 장난으로 내일 회사 가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진심이었던 것 같고요. 계엄이 터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아니, 진심으로 무서웠던 것 같아요. 집에 먹을 게 뭐뭐 있는지 생각했던 것 같고요. 고양이 사료는 집에 많아서 안심했었던 기억이 나요. 계엄이 해제되는 순간도 지켜보고, 해가 뜰 때까지 잠을 못 잤다가, 점점 무슨 상황이었는지 파악해갔던 것 같아요. 국회에 갈 생각은 전혀 못했습니다. 그때는 국회에 달려간 시민들이 무슨 일을 했던 건지도 생각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었습니다.

사진 2: 우연 제공
Q3. 처음 참석한 집회는 언제, 어디였나요?
김권: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도록 하는 집회에 갔습니다. 여자친구와 7일 전후로 몇 번 함께 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느날 밤에는 밤새 국회 게이트들을 지키는 여자들에게 먹을 걸 주러 갔고, 7일에는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라고 항의하기 위해 같이 집회에 갔습니다. 백팩에 핫팩, 돗자리, 생수, 보조배터리, 먹을 거를 넣고 같이 응원봉을 쥐고 갔어요. 사람이 너무 많았고 국회 정문 게이트 철창 앞에서 국회의사당 불빛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자친구가 두른 머플러가 흘러내려서 얼굴이 꽁꽁 얼까봐 얼른 머플러를 고쳐 둘러준 기억이 납니다.
우연: 2024년 12월 7일 서울 여의도 집회입니다. 계엄 선포 당일에 많은 시민이 국회로 달려갔고 그걸 지켜보면서 부채감이 있었어요. 저는 국회에 빠르게 갈 수 있는 곳에 살았었는데 불안과 두려움이 커서 국회에 가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회에 참여했고 혼자 갔어요. 혼자 간다는 점에 걱정되기도 했는데 혼자여도 충분하고 괜찮았습니다. 지하철역을 나오니 사람들이 같은 방향으로 가고있어서, 집회로 가는 길을 찾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었어요..! 정말 많은 사람, 정말 많은 깃발이 차도와 국회 부근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지개 깃발, 논바이너리 깃발 등 성소수자 깃발들이 있어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루니: 세월호 촛불 집회가 첫 집회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물에 빠졌고 구할 의지가 없다는게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게 화가났고 두려움을 뚫고 나갔습니다.
소연: 12월 6일 금요일 여의도 집회에 무지개행동 활동가들과 함께 상담소 깃발을 들고 참여했습니다. 광장에 성소수자의 존재를 함께 드러내야 한다는 목표가 초기부터 뚜렷했어요.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여의도 글래드호텔쪽으로 빠져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상담소 회원분들도 많이 만났고, 깃발을 대신 들어주는 분들도, 건강 챙기라고 한마디씩 건네던 분들도 계셨어요. 상담소 사무실에 있던 사탕이나 과자, 젤리를 들고와서 주변 참여자분들께 나눠드렸던 기억도 있어요.

사진 3: 우연 제공.
언제 어디서든 함께 하는 바이 플래그와 프로그레시브 플래그!
Q4. 집회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김권: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을 때 여자친구와 함께 집회가 끝나고 주차된 차로 돌아오던 길. 손을 잡고 신나서 걸어왔어요.
우연: 12월 14일에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는데 당시 국회 부근인 여의도 집회현장에 있었어요. 가결된 순간 너무 기뻤고 그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같이 환호성을 질러서 공간이 크게 울리는 게 짜릿했습니다. 이후에 노래를 틀고 다들 신나게 노래부르고 뛰고 탄핵촉구 구호를 외치는데 너무 신나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루니: 퀴어 축제 날도 아닌데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는 풍경이 비현실적이고 믿기지 않았습니다.
소연: 사실 좋았던 기억이 참 많은데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같은 목표를 향해 목소리 내는 느낌도 좋았고, 성소수자와 페미니스트, 여성 청년들의 무대 발언을 들으며 뭉클했던 기억도 나요. 초창기 여의도 집회는 정말 정신이 없었는데, 상담소 깃발을 들고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저도 레즈비언이에요!’ 하고 간식을 건네주신 적이 있어요. 그때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아, 그러시군요.’ 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담소 깃발의 존재가 누군가들에게 큰 힘이 되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요. 무엇보다 저는 올해 4월 1일에서 2일 까지 안국역 앞에서 진행한 24시간 철야농성이 기억에 남아요. 무지개행동 활동가들과 함께 무지개 텐트촌을 만들고, 간식과 음료도 나눠먹으며 해뜰때까지 이어지는 발언과 무대를 지켜봤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는 이미 파면선고 기일이 잡혔을 때라, 긴 시간 이어져온 싸움이 곧 끝나겠구나 하는 기대감과 설렘이 있었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지금이 마지막이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돌이켜봐도 그때 거기서 밤을 새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사진 4, 5: 루니 제공.
광장에서 마주친 유쾌한 깃발들!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 속에서도 반가움, 희망, 벅참이 함께 하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이유로 광장에 모인 우리는, 때로는 깃발과 응원봉을, 때로는 다른 이들에게 건넬 핫팩과 간식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쳤지요. 혼자여도 괜찮았고, 함께라서 더 벅찼던 기억. 어딜가든 무지개 깃발이 눈에 띄었고,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이 환대 받는 경험은 아마 오랫동안 잊기 어려울 거예요.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던 날은 벅찬 승리의 경험이기도 했지요. 우리의 경험들이 모이고 모여 광장의 한 페이지가 완성되었어요!
다음 편에서는 파면 선고의 순간과, 그 이후 우리가 함께 그려나갈 사회를 함께 상상해봅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