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바람
활동가 쇼어
손과 입술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서로를 따르는 행위처럼 가까운 듯 멀기도, 거리가 무색하게 느껴지기도, 전혀 다른 길을 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기로를 만드는 마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건 무엇일까요?
2019년 11월 13일 성소수자 가족구성권에 관련한 소송 및 입법운동 등을 벌이고 있는 성소수자가족구성권네트워크(이하 가구넷) 주최로 동성혼·파트너십 권리를 위한 국가인권위 집단 진정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많은 회원들께서도 이번 집단 진정에 참여하신 점을 계기로 활동가들과 회원 다섯 명이 기자회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도착한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앞은 가구넷의 회견 준비가 한창이었고, 출근길로 번잡한 도보에는 벌써 적지 않은 언론사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보도 자료로만 접하던 이런 활동에 참여하기는 처음이라 몸은 현장에 있음에도 정신은 미처 도착하지 못한 것처럼 긴장이 되었습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쓴 것은 저 뿐이었습니다.
대열을 갖추고 기자 회견이 시작될 즈음 빗방울이 발언문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언론과 행인들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었지만 인권위 쪽으로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평등, 행복, 사랑, 돌봄, 헌신이 적힌 플래카드 사이에 서서 Marriage Equality를 높이 들고 발언자 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느새 맞은 편 길을 오가는 사람들과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바로 저만치에서 이쪽으로 오기까지 고민했던 시간에 비해 거리는 이렇게나 가까웠구나 싶었습니다.
이번 공동진정인 성소수자는 1,056명입니다. 성소수자라 일컬어지며 축소당하고, 기만과 배제를 당연한 권리처럼 당해왔던 우리 삶이 날이 갈수록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일치점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같은 이유로 목숨을 잃어서는 안되고, 절망해서도, 눈물 흘려서도 안됩니다. 더 이상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너의 모습 외엔 알고 싶지 않아” 라는 말을 들으며 그것이 마땅하다 여겨야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구호를 외치고 진정서 제출에 함께 했습니다. 스스로를 보호한다고 썼던 마스크가 갈수록 답답해졌습니다.
현장에 함께 함으로 비로소 완전한 연대를 이룰 수 있음을 체감하는 이 하루동안 이날에 오기까지 애써온 헤아릴 수 없는 분들의 바람이 저를 이곳까지 오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으로 살 수 없도록 붙들어 왔던 것은 정말로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도록 의문의 방향을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렇게 남아 있는 작은 불안을 바라보며 이 불씨를 흔드는 바람의 자취를 더 분명하게 느낍니다.
우리, 라는 장소를 만들어 주는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모든 분들께, 서로를 일으켜주는 우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느 시의 마지막 부분을 건넵니다.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에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 포루그 파로흐자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