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임자료1. 왜 상담소인가]
<끼리끼리>의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의 전환
1994년 11월 끼리끼리 창설 당시엔 커뮤니티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전국에서 같은 동성애자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끼리끼리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남이 가능했다는 것만으로도 끼리끼리는 존재 의미가 있었습니다. 끼리끼리는 회원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한편, 사회의 호모포비아(동성애혐오증)에 대응하는 활동을 폈습니다.
레즈비언들 간의 소통의 창구가 되었던 끼리끼리는 인터넷 시대가 열린 1990년대 말부터 회원단체로서의 정체성이 위기를 맞았습니다. 집에서도 컴퓨터를 통해 얼마든지 여성이반들과 만날 수 있게 된 레즈비언들은 더 이상 끼리끼리라는 통로를 찾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커뮤니티냐, 인권운동이냐의 양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끼리끼리는 2001년 ‘인권운동’단체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됩니다.
끼리끼리의 운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온 것은 레즈비언 회원들과의 만남과 회원교육 이외에 사회적으로 동성애 이슈를 부각시키고 대응하는 것, 동성애 바로 알기 교육, 타 인권단체와의 교류, 여성동성애자 자긍심 갖기 프로그램,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 성폭력문제 공론화, 아우팅(동성애자의 성 정체성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타인에 의해 폭로되는 것) 및 레즈비언 대상 혐오범죄 대응 등입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제정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면서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에 대해서도 제도적인 관심과 구제의 길이 열렸습니다. 또한 국가적으로 각종 인권사안에 대한 연구와 대응활동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인권 분야에 비해 레즈비언 이슈는 정부기관이 전문성 있게 다가가기에 막혀 있는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드러나기’가 차단되어 있는 레즈비언의 현실 때문입니다.
레즈비언 인권운동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끼리끼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모색해보았을 때 그려지는 상은 다름아닌 상담소로의 전환이었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레즈비언들이 상담을 의뢰할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성 정체성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어렵고, 아우팅 위협 속에 놓여있는 대다수 여성동성애자들이 폭력과 차별을 겪어도 대응을 하기 어렵습니다. 끼리끼리는 상담업무를 보다 전문화시키고 보강시켜 레즈비언 대중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서기로 했습니다.
또한 레즈비언 이슈는 특정 담론이나 몇몇 활동가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레즈비언들의 존재 가까이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끼리끼리는 더욱 레즈비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레즈비언들의 현실과 한국의 현실은 공통적인 부분도 있지만 상이한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인권현황과 대응에 대해 주로 외국의 자료를 많이 참조하는 것이 한국의 상황이지만, 그대로 적용시킬 수 없고 적용시켜서도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른가, 한국의 레즈비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데에도 상담은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이제 끼리끼리는 레즈비언 상담을 큰 축으로 하여 인권활동을 벌여나가기 위해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 단체를 재정비했습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상담을 통해 레즈비언들의 현실에 더욱 다가설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인권이슈를 발굴할 것입니다. 상담소는 상담팀 이외에도 사무국을 두고 레즈비언 회원조직화에도 힘쓰는 한편, 레즈비언 인권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교육’ 분야에도 주력할 것입니다. 또한 인권정책을 발굴하고 연구하며, 사회적 여론화를 위한 출판 및 홍보에도 노력할 것입니다.
어떤 단체도 그 성격과 방법이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고정적일 때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되고 대중과 멀어지게 됩니다. 끼리끼리는 10년 운동의 성과를 토대로 다시 새롭게 지금 요구되는 역할을 다하고자 한국레즈비언상담소로 전환했습니다. 앞으로 또 몇 년 후엔 사회의 변화속도와 레즈비언의 요구에 맞춰 또다시 변화를 모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05. 04. 12
한국레즈비언상담소 (구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