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남성으로부터 안 좋은 경험을 당한 여성이 남성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레즈비언이 되는 건 아닌가요?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남성을 만나게 되면, 그런 경험을 당한 사람들도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거라고 보는데요.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에선 남성이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여성이 쉽게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때론 폭력의 피해자가 되곤 하지요. 남성으로부터 폭력, 특히 성적 폭력이나 학대를 경험한 여성들의 경우, 남성에 대한 혐오감이나 사회에 대한 혐오감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차별적인 세상에 저항하려 하는 여성들도 있지요.
그러나, 남성폭력의 피해자인 여성들이 모두 레즈비언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성 정체성을 결정하거나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양한 경험들을 수반하고 있다고 봐요. 따라서 성폭력 피해의 경험이 레즈비언 정체성 형성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성폭력 피해를 겪은 이성애자 여성들도 얼마든지 있어요. 또한 레즈비언들 중에 남성에 대해 혐오감을 갖지 않는 사람들도 많죠. 즉, 피해경험이 레즈비언 정체성 형성과정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남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가 여성으로 하여금 레즈비언이 되도록 만들었다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이끌림 그 자체가 여성으로 하여금 레즈비언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이해가 되려 나요?
우리 사회에서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이 존재합니다. 성 정체성 자체는 물론, 교제관계 등을 쉽게 드러내며 살 수 없고, 집안에서나 직장이나 사회 전반에서 이성과의 결혼압박에 시달리는 등 이성애중심적인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억압은 심각합니다.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은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인식하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레즈비언으로서 살아가겠노라 다짐하는 과정 속에서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겪은 레즈비언이라면, 아무리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좋은 남성을 만난다 하더라도 여성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남성에게 느끼기는 쉽지 않겠죠. 레즈비언 정체성은 여자가 좋은 남성을 만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답니다.
여자는 남자와 교제하고 결혼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죠. 만에 하나, 남성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자신이 레즈비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 여성이 굳이 이성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는 일이에요.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것은 잘못이 아니며, 그 자체가 불행한 일도 아니랍니다.
덧붙여 말씀을 드리자면 남성에 대한 혐오감도 그것이 남성폭력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면, 그러한 감정 자체를 비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피해를 겪은 사람들의 후유증이니까요. 다만 분노와 피해의식을 속으로 삭히고 묻어두려 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원인과 사회적인 원인을 밝혀내고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거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