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을 당해서 레즈비언이 될 수도 있나요?

성폭력을 당해서 레즈비언이 될 수도 있나요?
 
여성은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남성에 의한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남성 전반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남성에 의한 폭력을 경험한 여성이 반드시 레즈비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으로부터 폭력을 경험한 여성이 전부 레즈비언이 된다면, 한국 사회는 이성애자 여성보다 레즈비언의 비율이 더 높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각종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폭력 피해 경험이 성정체성을 탐색하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모든 여성에게 동일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남성 전반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더라도 특정 남성과는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여성이 적지 않습니다. 성폭력 피해 경험으로 인해 어떤 특정 남성과도 친밀한 관계는 갖지 않기를 선택하면서도 이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은 유지하는 여성도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남성을 기피하게 되면서 그걸 계기로 여성에게 끌릴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탐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레즈비언으로 정체화 하게 되는 여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성폭력 피해가 성정체성을 결정하는 데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와 같은 경험을 하였더라도 정체화 과정이 왜곡되었다거나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레즈비언으로서 살아가기로 선택한 것 자체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 결과에 문제가 있을 때 원인을 제거합니다. 질병이 대표적입니다. 치료를 하려면 병을 만든 원인을 찾아 조치를 취해야 하지요. 하지만 레즈비언 정체성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가 아니므로 문제를 일으킨 원인을 찾아 제거할 필요도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성폭력 피해 경험 자체를 치유해 나가는 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성폭력 피해를 치유하는 작업의 목표를 ‘레즈비언이 아닌 이성애자가 되기 위해서’ 로 설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