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들도 서로 사귈 때 남자 역할, 여자 역할 이렇게 나누나요? 많이들 그런다고 하던데요. 그러면 굳이 왜 동성끼리 사귀나요? 이성을 만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레즈비언들이 사귀는 관계는 사람에 따라서,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서 다양합니다. 그것을 굳이 남자 역할, 여자 역할로 나누어 바라보는 시선이나 그에 깔린 생각들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 남자 역할과 여자 역할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시기 바래요. 적극적으로 만남을 주도하는 것이 남자 역할인가요? 상대방을 챙겨주기 좋아하는 것이 여자 역할인가요? 혹은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이 남자 역할인가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수줍음을 잘 타는 것이 여자 역할인가요?
레즈비언 커플 간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성애자 커플 중에도 관계를 이끌어가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챙겨주기 좋아하는 남성도 많이 있잖아요. 남자 역할, 여자 역할에 대한 규정은 이성애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요구하고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에요. 자유와 평등, 인권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남성다움/여성다움이라는 성 역할 이데올로기는 버려야 할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레즈비언 커플 간의 관계에서, 성 역할이 구분된 경우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특히 1970년대 레즈비언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다 보면, 레즈비언들 사이에서도 남자 역할, 여자 역할과 같은 구분이나 규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엔 우리 사회에 레즈비언 역할 모델이 전혀 없었고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이었죠.
그런 사회에서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여 교제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과 같은 여성을 좋아하려면 자신이 남성이 되거나, 상대방이 남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요. 그래서 레즈비언 커플 관계에서도 이성애자들의 커플 관계처럼 남성적, 여성적인 역할 구분이 존재했던 것이겠죠.
그렇다고 해서 당시 레즈비언 커플 관계가 이성애자들의 커플 관계와 같았다거나, 굳이 동성애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한 생각이죠. 반대로 생각을 해보세요. 동성애 커플 관계가 이성애 커플 관계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도, 굳이 그 사람들이 동성과 사귀었던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레즈비언 권리운동이 시작된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고, 온라인, 오프라인 레즈비언 커뮤니티 수도 급속도로 증가한 지금은 사람들의 인식이나 삶의 변화와 더불어 레즈비언 커플의 관계도 상당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레즈비언 커플 간에 굳이 남성적이다, 여성적이다, 하는 구분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사랑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많이 확산됐죠. 그런 식의 역할 구분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습니다.
성 역할 구분이 존재했던 시절이나, 그렇지 않게 된 지금이나, 여성과 여성의 교제가 바로 레즈비언 커플 관계라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성을 만나는 것과는 다르지요. 무엇보다, 레즈비언 정체성과 교제 관계, 커플 관계에 대한 정보가 많이 주어질수록 좋겠지요. 차별적인 사회가 만들어놓은 획일적인 인간관계, 삶의 모델이 아니라, 우리 나름의 관계의 모델과 삶의 방식을 찾고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또한 남성 역할, 여성 역할과 같은 이분법적인 분리는 동성애 관계뿐 아니라 이성애 관계 속에서도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성애 커플 사이에 여자는 이래야 하고 남자는 저래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정, 얼마나 답답하고 우스꽝스러운가요? 개인의 자율권과, 커플간의 다양한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전근대적인 규정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