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와 어울릴 정도로는 크면 좋겠는데
엄마가 날더러 이제 더 이상 키는 크지 않을 거라고 했을 때부터 냉장고에 있는 우유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자꾸만 신경 쓰이는 우리 반 그 애와 어울릴 정도로는 크면 좋겠는데, 키는 마음먹은 대로 커주지 않았다. 하긴 그 시절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 어디 키뿐이겠느냐마는. 그 애는 나보다 키가 20센티미터는 더 컸다. 그래도 학교 대표 농구선수들 중에는 제일 작다고, 더 많이 컸으면 좋겠다고 낮게 중얼거리곤 했다. 내가 “난 어떻게 하면 키가 클까” 지겹도록 물으면 이것저것 많이 대답해 줬던 그 애의 정직한 얼굴. 그러고 보니 그 애가 얘기해 줬던 김치와 콩나물도 그 때부터 잘 먹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키 때문에라도 서로 가까이 자리 잡을 일이 없었을 텐데 그 애랑 나는 신기하게 항상 근처에 앉았다. 출석 번호가 비슷하기라도 했는지. 자리가 바뀔 때마다 그 애 책상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이번에는 나랑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내가 뒤돌아보면 눈길 닿을 만한 곳에 그 애 책상이 있는지. 쪽지 시험 볼 때 킥킥거리며 커닝을 할 수 있는 위치라면 제일 좋았다. 수업에 자주 들어오지 못하는 그 애를 위해 필기한 것들을 잔뜩 보여주기도 했는데, 정작 그 애는 연습하느라 피곤해서 다 읽지는 못 했을 것 같다.
날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그 애는 나처럼 말이 많은 애도 아니었고 수더분하게 먼저 다가오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래서 뭔가를 물어보는 건 항상 나였고 그 애는 대부분 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나는 언제나 그 애와 함께 무언가를 얘기하는 시간이 좋았다. 종종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가끔 내 목소리가 갈라질 때도 있었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 애가 연습하러 나간 오후 수업은 어찌나 허전하고 따분했는지. 우리는 다른 동급 친구 사귀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몸으로 익히고 배워야 하는 ‘자연스러움’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그 애 목소리를 멀리서만 들어도 심장이 뛰었다.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는 게 부끄러워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선물을 하고 싶은데 날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사물함에 몰래 넣어둔 적도 있다. 그래, 이거다. 그 애도 다른 사람들도 날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누군가 나를 못살게 군 것도 아닌데, 나는 스스로에게 마음과 눈동자를 감춰야 한다고 암시하고 또 타일렀다.
이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흘러들어온 것일까. 같은 반 친구가 좋아지면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다른 친구 말고 그 친구하고만 함께 있고 싶을 수도 있는 거지, 나는 어떻게 이게 ‘이상한’ 마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어딘가 좀 이상하다고, 정상적이지 않다고 ‘머리’로 인식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 때가 (동성애라든가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던) 열세 살 때였다.
그때 누군가 다른 얘기를 해줬더라면
그때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10년도 훨씬 넘게 지난 지금, 나는 십대 레즈비언 활동가를 만난다. 내 마음과 내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해 그냥 묻어 두었던 많은 것들을 그는 레즈비언이라는 이름에 담아 씩씩하게 살고 있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을까, 고개를 젓는다. 바로 어제도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해 집을 나온 친구는 공원에서 잤을 텐데, 학교에서는 또 불시에 이반을 검열할 텐데. 그래, 내가 열세 살 때 느꼈던 이질감은, 이렇게 드러난 폭력과 드러나지 않는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알려주었더라면 상황은 좀 더 달라졌을까. 나는 좀 더 움츠러들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을까. 그 애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가슴 벅차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사춘기를 이성에 눈 뜨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한다. 그때 누군가 이성뿐 아니라 동성의 상대에게도 이끌릴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면 조금 덜 방황했을 텐데. 그리고 나 자신의 소중한 감정들을 조금 더 아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범죄라도 저지른 애처럼 매일 부릅뜨고 나를 다그쳤던 그 시절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프다.
원영 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https://lsangdam.org)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