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대학원신문 51호 ::
_ 2006년 3월 8일
_ 김윤서이
최근 소위 저출산 위기라고 일컬어지는 사회 변화와 관련하여 정부가 내놓은 조세 대책 때문에 여론이 들끓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저출산과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마련했다는 대안이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전보다 더 큰 짐을 지우는 방향으로 짜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자녀 가구 중심으로 세금 감면 혜택을 주겠다는 정부의 발상에 엄연히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 명의 레즈비언으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여러 진영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지만, 그 안에서조차 레즈비언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정 연령 이상의 레즈비언은 필연적으로, 세금을 낼 의무를 지며 노동하고 있는 성인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주도하는 정책에서는 그 존재를 삭제당하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정부 정책에서도 이 점을 뼈아프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권리를 주장할 토대조차 박탈당한 상태이다. 말하자면 레즈비언들은 국가정책의 적용 대상으로서의 지위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물론 남성과 함께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해야만 ‘정상적’인 성인 여성으로 여겨지는 사회의 뿌리 깊은 이성애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가 요구하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존재라는 이유로 레즈비언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레즈비언들은 비단 정책결정과정에서 그 존재자체를 간과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비정상 취급을 받으며 손가락질 받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여자라면 당연히 남자에게 이끌려야 하고, 남자와 성관계를 해야 하고, 남자와 결혼을 하여 그로부터 사회 구성원을 재생산해야 하는데, 레즈비언은 자신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게 이끌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자신들의 상식이 얼마나 비틀려 있는가를 점검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숱한 사람들에게 레즈비언이란 존재는 눈엣가시, 괴물, ‘정상적’인 세계의 질서 바깥에 있는 이상 현상 정도밖에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통념과 제도가 규정하고 있는 출산이라는 사회적 ‘의무’를 과연 누가, 무엇을 위해서, 어떤 시각에 기초하여 빚어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부터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순수혈통주의자, 민족주의자, 신자유주의자들이. 무엇을 위해서? 한민족의 혈통을 계승하고 민족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 노동력의 민족 자체 내 재생산을 위해서. 어떤 시각에서? 자신들의 지향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은 간단히 무시해 버리면서 자신들의 지향에 걸맞는 존재 양식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의 기본권은 권리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각에서. 이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들은 권리를 보장받을 자격이 없다는 효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개개인이 갖고 있는 특수성이란 것은 그저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마는 사고방식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의무와 권리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각의 문제점을 간파해 낼 수 있게 된다. 의무를 규정하는 권력 자체가 소수자의 권리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자신들이 규정하는 의무를 다 할 수 없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은 애초부터 떨궈 내고 시작하는 꼴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로부터 저출산 위기라는 현실 인식에 깔려 있는 소수자를 배제하는 시각 역시 도출해낼 수 있다.
자녀를 낳아 기르기에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한국 사회에서 하루하루 숨쉬기조차 너무 힘든 이주노동자의 척박한 현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출산을 미룰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맞벌이 부부의 현실, 건강상의 이유로 출산을 감행할 수 없는 여성들의 현실, 파트너십을 인정받을 수 없어 각종 조세혜택으로부터 비껴나 있는데다가 입양할 수 있는 권리조차 갖지 못해 자녀를 양육할 꿈은 꾸지도 못하는 동성애자의 현실 등등이 바로 정부가 내린 진단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정부정책 속에서 한국 땅에서 자녀를 많이 낳도록 권장되는 것은 한국인들일 뿐이며,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가져야만 하는 권리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고, 여성이기에 노동 시장에서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며 기혼 부부가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으로부터 밀려나 있어 더욱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결혼하지 않는 레즈비언의 존재는 아예 삭제되어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레즈비언들은 권리보장을 받아야만 하는 사회 구성원이 아닌, 저출산 위기를 강화시키는데 일조하는 사회의 방해꾼들로 전락한다. 아니, 전락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워낙에 걸리적거리는 존재 취급들을 받아왔으니, 새삼스럽게 그런 존재로 전락했다는 표현까지 쓸 필요는 없겠다. 레즈비언들은 결혼하지 않음으로 해서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불효자식이고 출산하지 않음으로 해서 국가의 명운을 흐리게 하는 매국노이다. 그래서일까. 레즈비언더러 이성애자들의 자녀를 양육하는 데 피땀 흘려 번 돈을 갖다 바치라고 하는 것은. 파트너와 몇 십 년을 함께 살아도 가족 혜택을 받지 못하고, 아무리 아이를 입양해서 기르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기에 다른 누구보다 먼저 자립의 길을 헤쳐 가며 여성으로서, 동성애자로서 겪는 헤아릴 수 없는 차별과 폭력을 감내하고 있는 레즈비언들에게 지금보다 더 희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우리 레즈비언들과는 상관없는 자들만의 대한민국인가 보다. 국민으로서 국민다운 대접도 못 받고 있는 우리에게 국민으로서 국가의 앞날을 개척하는 길에 동참하라고 하지 말라. 그럴수록 오히려 우리는 차라리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지 않는 길을 택하고 싶어질 뿐이다. 우리에게는 저출산이 위기가 아니라 저출산 대책이 더 큰 위기이다. 그것을 모르는 이들에게 나라를 맡겨두고 정말 갑갑한 심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