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대신문 1312호 ::
_ 2006년 4월 4일
_ 김김찬영
영화 <왕의 남자>가 전국에서 1천 230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최근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한국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픽션 안에서 동성애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현실 속에 있는 레즈비언들의 고민과 아픔을 실제로 덜어주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레즈비언의 존재는 픽션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왕의 남자’는 있어도 ‘세자빈 봉씨와 소쌍’은 없고, ‘브로크백 마운틴’의 이야기는 있어도 ‘레스보스’의 이야기는 없다. 게이가 동성애자를 대표하고 동성애는 곧 남성간의 사랑으로 일컬어지는 상황에서, 레즈비언은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 레즈비언이 겪어야 하는 차별과 억압은 더욱 크다. 레즈비언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레즈비언에 관한 올바른 정보 역시 말해지지 않는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성들이 가지는 동성을 향한 사랑은 낭만적 우정으로 치부되기 일쑤이다. 역할모델이 없다 보니 고백, 교제, 커밍아웃 등 레즈비언으로서 겪어야 할 삶 전반에 관한 불안은 클 수밖에 없다. 또한 레즈비언이 그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현실을 이용한 악성 범죄도 극심하다. ‘네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통해, 레즈비언에게 금품갈취, 강간 등을 일삼는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무엇이 레즈비언 정체성을 드러나지 못하도록 하는가. 레즈비언은 동성애자 정체성과 동시에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다.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편견과 더불어 여성을 향한 차별이 레즈비언을 이중으로 억누르고 있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타인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의존적인 존재로 길들여지도록 하는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레즈비언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여성이 출산과 양육의 도구일 뿐 성과 사랑의 주체로 서지 못하며, 여성을 대상으로 한 차별과 범죄가 계속된다면, 레즈비언을 향한 억압 역시 유지되고 강화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를 통해 감동을 얻지만, 영화 안의 그들을 고통스럽게 한 것이 누구였는지는 성찰하지 않는다. 왜 그 많은 영화들은 게이들의 이야기만을 다루는지 묻지 않고, 영화 안에서조차 레즈비언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이 무엇 때문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고통받았던 자는 서로를 사랑했던 두 남성뿐만이 아니다. 그들 주변의 아내와 딸들, 애인들, 부모님들 모두가 둘의 알 수 없는 방황과 고독으로 인해 외롭고 괴로워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인 이상, 레즈비언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면, 이성애자들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누가 레즈비언을 보이지 않게 하는지, 무엇이 동성애자를 괴롭게 하는지를 성찰한다면, 여성을 향해 자연스럽게 ‘남자친구 있어?’라는 질문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레즈비언은 바로 당신 도처에 있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레즈비언의 존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첫 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