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16회 서울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를 맞이하며

 

[성명] 16회 서울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를 맞이하며

 

16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오는 일요일인 6월 28일 자긍심 퍼레이드로 대단원을 맞이합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도 언제나처럼 참여합니다.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여러 성소수자가 개최 장소인 시청 앞 서울 광장을 가득 메울 것입니다. 노래하고 춤추고 구호를 외치며 존재를 증명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광장과 거리의 기억이, 광장과 거리에는 우리의 존재가 깊이 새겨질 것입니다. 서울의 역사가 그렇게 새로 기록됩니다. 지지자, 행인, 나들이객 등도 한데 어울려 즐기겠지요. 다름을 긍정하고 공존을 도모하는 정신이 인파 속을 술렁이고, 성소수자 인권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이 여기저기 나부낄 것입니다. 모두가 저마다 빛나며 서로를 비춰 줄 날입니다.

 

자긍심 퍼레이드는 누구나 자기가 느끼는 방식대로 자기 성별을 규정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것을 표현할 권리를 가지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이 자기와 같다는 이유로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거듭 재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할지, 자기 몸을 어떻게 돌보고 변형시킬지,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지 결정할 몫이 온전히 개개인에게 있으며 누구도 그 몫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뚜렷이 강조하는 자리입니다. 출생 시 부여받는 성별만이 진정한 성별이라거나 이성애만이 자연이고 정상이라는 주장은 명백히 틀렸다는 입장을 자신감 있게 내보이는 시공간입니다. 어떤 누구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성별표현을 이유로 가정, 학교, 일터, 지역 사회에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한마음으로 외치는 행사입니다.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는 우애와 연대의 장입니다.

 

이런 소중한 축제가 열리기까지 올해에는 특히 더 난관이 심했습니다. 

 

작년 서울퀴어문화축제와 대구퀴어문화축제에 찾아와 행사 진행이 불가하도록 폭력적으로 소동을 피운 보수-개신교 연합 혐오 세력을 기억합니다. 이들은 동성애 반대를 기치로 이후로도 더욱 가열하게 혐오와 차별의 운동을 이어왔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겨울 서울시민인권헌장 공포가 끝내 좌초된 배경에도 동성애 반대 논리로 서울시를 압박한 보수개신교계가 자리 잡고 있지요.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한 행사마다 쫓아와 폭력적으로 훼방 놓곤 하는 이들은, 올해 퀴어문화축제 자긍심 퍼레이드 역시 저지해 내겠다고 필사적이었습니다. 오로지 퀴어문화축제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퍼레이드 원래 예정 날짜였던 6월 13일에 맞춰 대학로를 포함한 서울 시내 주요 지역에 실체도 없는 집회의 신고를 모조리 해 버리는 비겁함을 마다치 않았습니다.

 

걸림돌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퍼레이드 날짜를 6월 28일로 바꾸어 집회 신고를 한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에 “옥외집회금지통고”를 내립니다. 먼저 접수된 다른 집회들(보수개신교계의 맞불 집회)과 행진 시간 및 장소의 경합이 예상된다는 것, 나아가 행진 경로가 “주요 도로”라 “심각한 교통불편”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늦게 접수되지도 않았거니와 거리 행진 또한 교통불편을 초래하기 어려운 시간대이자 경로를 따라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지요. 무엇보다 이미 몇 차례나 같은 행사를 무리 없이 치른 적 있는 경로였기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상 금지통고사유 요건에 해당하는 “심각한 교통불편”을 이유로 퍼레이드를 금지할 명분조차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결국, 이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평화적으로 집회와 행진을 하고자 하는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차별 결정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보수개신교계 혐오세력은 자기들의 입김이 공권력에 먹힌다는 인상을 받았겠지요. 경찰의 깊은 의도야 무엇이었든 퍼레이드에 대한 금지통고 그 자체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힘을 실어 준 셈입니다.

 

이런 가운데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의 이의 신청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이 지난 16일 내린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옥외집회금지통고 효력정지 결정”은 반가운 일입니다. 결정문을 요약하면 경찰청이 집회를 금지해야 할 까닭을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금지통고의 효력이 이어질 시 축제 조직위 측이 입을 손해가 우려된다는 내용입니다. 퀴어문화축제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고 성소수자들의 평등권 및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재확인해 준 것입니다.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일이 보장되지 못한 상황을 두고 이의가 제기된 것인 만큼 금지통고에 대한 법원의 효력정지 결정은 마땅하기 그지없습니다. 

 

퍼레이드가 며칠 뒤로 다가오자 동성애를 “반대”하는 세력은 마음이 급한가 봅니다. 보수 개신교계의 한 교단 연합체는 사흘 전인 23일 <국민일보>에 전면광고를 실어, 자긍심 퍼레이드 당일인 28일 “동성애조장”을 “중단촉구”하는 “국민대회”를 열겠다고 선언하며 총궐기를 기약했습니다. 이들은 동성애자뿐 아니라 여러 성소수자가 자긍심을 다지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퀴어문화축제를 “공연 음란성이 상존”하는 “동성애축제”로 왜곡하며 그것이 마치 민족과 국가의 존립을 뒤흔드는 사태인 양 묘사합니다. 하지만 세계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도 성소수자 인권 신장이 사회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위험에 빠뜨린 사례는 보고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성소수자의 행복추구권이 보장될수록 사회는 안전해지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평등 지수는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 사회의 미래가 걱정된다면 인권을 상시 침해당하는 사회적 소수자를 공격할 게 아닙니다. 부패한 권력, 무능한 정치, 부의 불균형적 분배에 맞서 싸워야지요. 성차별과 인종차별과 국가폭력에 저항해야 하고요. 살아가는 존재라면 모두 물과 공기와 대지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환경 파괴를 막고 동물의 권리를 보호해야 합니다.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 차이들이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는 세상, 서로서로 다름을 무시하거나 경멸하거나 비난하기보다 경탄의 마음으로 인정하고 공존할 길을 찾는 세상을 위해 싸웁시다. 당신들의 역량과 집중력을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써 주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성소수자에게 좋은 세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세상입니다. 억압받던 이들이 누리는 인권의 지평이 한 뼘 넓어지면 그건 모두를 그만큼 해방시킵니다.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에, 약자를 핍박해도 좋다, 약자는 공격해야 옳다는 가르침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나요? 그게 아니라면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에서 만납시다. 퍼레이드에 찾아와 소동을 부리기보다 우리의 삶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보기를 권합니다.

 

자꾸만 공격받는다고 물러날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란 모두의 인권과 직결된 사안임을 절감하는 사회 각계 무수한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28일 일요일 서울은 맑다고 합니다. 모두에게 공평한 햇빛 아래 우리도 햇빛처럼 반짝일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스럽게 보여 주겠습니다. 달라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광장과 거리에 나서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누구와도 미움 없이 사랑만으로 마주 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내일 만나요.

 

2015년 6월 27일 토요일

한국레즈비언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