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폭력의 순환고리 속 십대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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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2006년 8월 23일
_ 나루

“폭력의 순환고리 속 십대여성”
-정심여학교 인권교육을 다녀와서

<인권에 대해 배울 권리를 요구하고 실천하는 인권단체와 교육활동가들의 연대모임인 ‘인권교육네트워크’에서 안양소년원 내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 학생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와 고민에 대해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기사는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인 나루, 원영, 케이님이 공동으로 논의한 것을 나루님이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인권교육네트워크에서는 지난 8월 4일, 7일, 8일 사흘에 걸쳐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에 인권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정심여학교는 법무부 소속 교육기관으로, 법원에서 소년원 송치 처분을 받은 14세~19세까지의 여성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안양소년원으로 불리기도 했죠.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는 이번 교육에 활동가 세 명이 참여했습니다.

법원에서 처분을 받은 “범죄소년”들과 함께 하는 인권교육이라고 해서, 그들이 저질렀던 가해에 대해 훈계하거나 심성훈련을 시키는 프로그램을 실시한 것은 아닙니다. 학생들이 여성으로서, 십대로서, 사법절차에서의 수사대상으로서 겪었던 차별과 폭력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또한 일방적인 강의 식 교육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학생들과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했고요.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십대여성들

첫날은 게임과 함께, 인권교육이 진행되는 3일 동안 서로 지켜야 할 약속을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규칙을 만드는 것부터 직접 참여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로 진행됐는데, 예를 들면 억압 받았던 상황을 적어서 빙고 게임을 한다거나, 잡지에서 오린 여러 사람들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꾸며보는 것 등입니다. 나무 그림 위에 차별 받은 경험을 적은 후, 그 차별을 없애기 위해 바뀌어야 할 점을 다시 적어봄으로써 인권의 나무를 만들어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학생들이 관심을 많이 보였던 것은 여성과 인권, 사법절차와 인권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여성과 인권에서는 주로 몸의 권리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대화 상황을 주고 빈 말풍선을 채워보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인 순결 이데올로기나 외모 중심적인 생각을 점검하기도 하고, 성적자기결정권의 의미와 구체적인 권리 찾기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았습니다.

사법절차와 인권 프로그램은 십대들이 법원, 경찰과 검찰, 분류심사원, 그리고 소년원을 가정한 네 곳을 돌아다니면서 그 때 겪었던 억울한 일들과 하지 못했던 말들을 풀어놓는 형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대부분 이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특히 소년원 방과 욕실까지 설치되어 있는 CCTV의 문제나, 그 CCTV가 돌아갈 수 있도록 취침시간에도 소등할 수 없는 불편함 등에 대해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저희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하는 말을 들을 땐 가슴이 아팠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인권교육에 재미있게 참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활발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은 여느 십대여성들과 다를 바 없었지요. 이 학생들이 폭행, 절도, 마약 등으로 인해 수감되어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요. 그러나 때때로 우리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걔를 감금해서 묶어놓고 팼어요. 그런데 때릴 때는 아무리 일어나라고 발로 차도 안 깨어나다가, 통닭 사왔다고 먹으라니까 일어나서 먹는 거 있죠. 그렇게 맞고도 밥은 먹고 싶었나 봐요.”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 학생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할지 당혹스러웠습니다. “이반인 애들이 손 붙잡고 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서 패줬다”는 학생도 있었는데, 레즈비언이 역겹고 싫다고 말하는 그 아이에게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미는 마음은 어쩔 수 없더군요. 우리들은 십대 동성애자들이 학교에서 겪는 괴롭힘, 왕따, 폭행문제에 대해 수없이 상담해왔는데, 바로 동성애 혐오범죄의 가해자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이었죠.

위계구조 속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모든 폭력은 권력구조와 연관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힘의 역학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이 더 아래 있는 사람에게 가하는 것이죠. 사회는 절대적인 하나의 권력이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부장제, 이성애중심주의, 비장애인 중심주의, 나이주의 등이 얽히고 설켜있습니다. 때문에 레즈비언인 나는 어떤 이성애자와의 관계 속에서 피해자일 수 있지만 또 다른 관계, 이를 테면 어떤 십대여성과의 관계 속에서는 가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십대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겪었던 여러 종류의 폭력과 억압에 대해 알 수 있었지요. 그러나 사회의 차별적인 가치관을 내면화하고 있는 학생들은 레즈비언에 대해서, 장애인에 대해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후배나 힘이 약하고 소극적인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 폭력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인권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십대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 많이 준비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우리들 사이에는 나이와 지위에 따른 권력관계가 존재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인권교육의 ‘교사’ 자격으로서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학생들이 레즈비언에 대한 혐오감을 즉각적으로 드러낼 때, 그런 아이들과 평등하고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행위들로 인해 고통을 당했거나 동성애 혐오범죄 피해자들과 만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두렵고 화가 나는 감정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서 평화적인 방식으로 솔직한 느낌과 의견을 전달할 수 있을지 여부가 가장 큰 고민이었죠.

운동을 하다 보면 소통의 가능성과 힘에 대해 새삼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학생들의 관점에서 함께 대화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폭력의 구조나 피해의 경험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한부모 가정의 자녀나 동성애자에 대해 놀림거리로 삼다가도, 그렇게 놀림을 받으면 친구가 무척 힘들고 괴로워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잘 공감했습니다.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과 연관 지어 다른 종류의 폭력에 대해 설명하면 더욱 잘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속상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십대들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공감의 능력을 보여주고 예리하게 현실 문제를 짚어내는 것은, 그 아이들이 그만큼 주변부에 위치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학생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3일뿐이라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내면화하고 있는 많은 편견, 이들에게 남겨져 있는 폭력의 상처는 짧은 기간 동안 다루어지기에는 너무 깊고 강한 것들이니까요. 한편으로는 3일 동안 학생들과 최대한 많은 것들을 나눠야 한다는 점이 활동가들의 마음을 조급하고 무겁게 하기도 했고요. 다음 글에서는 소년원 안의 위계와 권력의 문제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인권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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