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레즈비언에게 빈곤이란

:: 서울대학교 여성주의 자치언론 <쥬이쌍스> 12호 ::

_ 2005년 6월
_ 수연(시로)

레즈비언은 가난하다. 유색인종이며 여성이고, 동성애자인 한국사회 레즈비언들은 분명 최하위 빈곤 그룹에 매우 가깝다. 빈곤이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과 무관하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명제가 되었듯이, 레즈비언의 빈곤을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레즈비언이 더욱 빈곤하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의 ‘빈곤화 시스템’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과연 이성애자 비혼 여성에 비해, 동성애자 남성에 비해 레즈비언이 더욱 빈곤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직장의 꽃’으로 남을 것인가, 레즈비언으로 살 것인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앞선 세대의 레즈비언들의 삶, 그들의 인생지도 안에서 어떻게 빈곤화가 단계적으로 작동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40-50대의 레즈비언들의 삶에서 우리는 명료하게 우리의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40-50대의 레즈비언들 중 외모가 그다지 ‘여성스럽지’ 않은 레즈비언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들이 특히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1>). 이들은 ‘남자’같은 외모와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70-80년대의 한국사회는 회사 내에서 유니폼을 착용하는 것을 의무규정으로 두는 곳이 많았는데, 여성들은 당연히 치마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따라서 ‘여성스럽지’않은 외모를 한 레즈비언들은 이러한 치마 유니폼을 입기를 거부했고, 직장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치마 유니폼을 입지 않을-사회적 ‘여성스러움’을 강요당하지 않을-권리와 실직의 권리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부치(2>)들이 사회생활하기가 어렵지. 가깝게 지내던 후배가 있었는데 은행에 입사해서 얼마 안 되서 그만뒀다고. 유니폼이 스커튼데 그게 입기 싫어서 그만둔거라구. 특히 부치들이 이런 일 때문에 적응을 잘 못해. 일반 생활이라는 게 남성들이 중심적인 사회인 거잖아….우리 때만 해도 여자는 ‘직장의 꽃’ 이런 분위기였어.(3>)”

– 사례 4 : 40대 레즈비언의 증언

위와 같은 상황에 처한 40대 레즈비언은 자신이 직접 회사를 뛰쳐나오거나 회사로부터 ‘사회 부적응자’라는 심판과 함께 내쳐지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상대적으로 직업에 대한 수요가 적은, 위험하고 보수가 낮은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이는 사회적 역할모델, 즉 가부장제가 규정하는 역할모델이 어떻게 그것에서 벗어난 그룹들을 소외시키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사례는 레즈비언은 빈곤을 향하도록 이미 결정된 그룹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 견고한 ‘빈곤화 시스템’을 보여준다.

물론 레즈비언들이 모두 ‘남성’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40-50대 레즈비언들의 경우, 자신들이 레즈비언-여성에게 끌리는 여성-으로 정체화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남자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들은 (지금과 달리)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주위에서 레즈비언 ‘모델’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동성에게 끌리는 이유가 자신이 ‘남자 같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이 ‘남성적인 외모’를 고수하는 것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닌, 그들의 정체성과 삶의 맥락 전체를 뒤흔드는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2. 한국사회 동성애혐오증(homophobia)과 레즈비언의 자기혐오

한편, 이들은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남들과 다른 삶을 지향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소외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레즈비언을 부정하고, 혐오하는 우리 사회의 시각을 내면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잘 살기 위해 노력해 봤자지. 어차피 비정상에 변태인 레즈비언인걸’이라는 생각이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삶에 대한 긍정적 열정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것이다.

“직업을 고를 때,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하거나 전문직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내가 왜 구태여 눈높이를 낮게 해서 그렇게 밖에 못살았을까 싶어. 어떤 면에서는 열등의식이나 자격지심 때문이었던 것 같아. 내가 외면당할 수 있다는 생각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그런 건 아니었고 스무 살 넘어서 (내 정체성으로 인한)갈등이 생기면서 그렇게 된 거지….점점 갈수록 내가 레즈비언이란 게 분명해 지니까 정신이 혼란스럽고 어떻게 내가 앞으로 살아갈 것인지 막막하더라고..”

– 사례7 : 40대 레즈비언의 증언

이러한 현실은 30여년이 지난 오늘 날도 그리 다르지 않다.

얼마 전 개최된 인권영화제에 ‘이반검열’이라는 작품이 상영되었다. 이는 중학생인 한 10대 레즈비언이 직접 촬영한 일상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것이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촬영 당사자인 10대 레즈비언이 학교에서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되고,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을 강요당하는 일상의 모습들을 따라 전개된다. 학교가 성인이 되기 전 거치는 ‘작은 사회’라면, 영화 속 일상을 사는 그 10대 레즈비언에게 과연 ‘사회’는 무엇일까? 이 사회 전체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왕따시키고 스스로를 부정하도록 강요한다면, 그들에게 이 사회는 이미 ‘괴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3. 레즈비언의 빈곤화

빈곤은 번창하던 사업가에게 한순간의 실수로 갑자기 찾아오는 형상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그룹들이 빈곤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전 생애에 걸쳐 끈질기고 깊이 있게 그들을 옭아매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는 그 순간부터 혹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레즈비언은 빈곤을 향해 가게 된다. 학교든 사회든 직장이든 모든 곳에서 레즈비언 개인을 둘러싼 모든 사회 영역에서 레즈비언을 옭죄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은 일상적 소외를 경험하고 자기 혐오를 내면화하면서 자긍심을 잃어버리고, 폭력과 차별에 노출된다. 이들의 전 생애에 걸쳐 정신적, 경제적 빈곤화가 진행되다가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견고한 늪에서 허우적 거리며 일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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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문장은 레즈비언이 모두 ‘남자’같은 외모를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즈비언에 대해 가지는 수많은 편견 중 하나는 ‘레즈비언은 모두 남자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레즈비언을 ‘남성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이성애 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레즈비언은 이성애자 여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외모와 특성을 지녔고, 단순하게 남성을 모방하거나 남성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결코 아니다.

2> 90년대 이후 한국사회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사용하게 된 외래어(butch)이다. 흔히 말하는 ‘남성적’ 성향-짧은 머리와 괄괄한 성격으로 대표되는-을 지닌 레즈비언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레즈비언이 사용하지는 않으며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사용하는 그룹, 반대하는 그룹, 금지하는 그룹, 사용을 지양하는 그룹 등 그룹의 성격에 맞게 사용되고 있다.

3>「40대 레즈비언, 그녀들의 삶과 사랑」『레즈비언, 그녀들의 다름과 같음의 목소리들』레즈비언인권연구소,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