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 책임을 방기하는 국가와 의료기관, 재판부 모두가 유죄다

[성명서] 책임을 방기하는 국가와 의료기관, 재판부 모두가 유죄다

– 난자채취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기각에 대한 여성단체 네트워크의 입장을 지지하며

2009년 2월 1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89단독 박재현 판사는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연구팀에 난자를 제공했던 여성 2명이 국가와 성심의료재단(미즈메디 병원), 한양학원(한양대병원)을 상태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결정을 내렸다.

“난자채취 시술의 후유증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것은 인정되지만 법률적으로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고 심각한 합병증이 없는 이상 손해배상 제기가 불가능하다”는 재판부의 결정은 난자채취 과정에서 발생한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를 사실상 묵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적’으로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소송에서 피해 여성들이 제기한 핵심적인 문제는 첫째, 황우석 연구팀이 난자의 사용 방안에 대해 허위 또는 불충분한 정보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둘째, 난자채취 시술 과정이나 그 이후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난자의 사용 방안에 대한 불충분한 정보 제공 혐의에 대해 재판부는 “실험의 모든 목적과 과정에 대한 정확하고도 상세한 설명까지 필요하다고 할 수 없고 전문적인 의학실험에 있어서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고 판단했다. 연구팀이 제공한 기증안내서와 동의서에 이미 기증된 난자가 줄기세포 연구에 쓰인다는 점이 드러나 있고 체세포 핵이식을 통한 환자맞춤형 줄기세포의 확립과정, 줄기세포 연구 단계 등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기증자들이 자기결정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난자기증자들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위한 전제로 선행되어야 할 의료기관 및 연구팀의 설명의 의무가 단순히 기증동의서에 서명을 받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피해자들은 기증한 난자가 초기단계의 기초 연구에 사용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체세포 핵이식 줄기세포가 수립된 것으로 알고 기증했거나, 곧바로 난치병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사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안내되어야 할 정보인 난자의 사용 방안조차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거나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점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모든 목적과 과정에 대한 정확하고도 상세한 설명”의 어려움을 친히 미루어 짐작하고 배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06년 황우석 연구팀의 논문조작 사건 이후 학계와 법조계, 정부 및 언론이 한 목소리로 성과 중심적인 연구문화에 대해 반성하며 ‘생명과학 연구에서의 윤리’를 주장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의문이다.

두 번째, 난자채취 과정과 그 이후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설명이 불충분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합병증을 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미 2006년 11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황우석 연구의 생명윤리 문제에 대한 보고서> 발표에서 ‘황우석 연구팀은 난자 수급을 전제로 하는 연구계획 당시부터 과배란 증후군 환자에 대한 사후적인 조치에 이르기까지 난자를 제공하는 여성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나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난자를 기증한 여성들의 육체적∙정신적 고통과 후유증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합병증이 아니기 때문에 부작용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결은, 결국 생명과학 연구에서 발생한 윤리적 책임을 아무에게도 지우지 않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난자 채취의 부작용과 위험 설명에 대한 절차적인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가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받을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결국 그 자체가 기만적인 판결인 것이다.

재판부의 판단은 결국 난자를 기증하고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그 고통을 온전히 혼자서 감수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더 심각한 수준의 합병증’이라는 결과를 통해 절차상의 문제점을 증명해 내라는 요구처럼 들릴 뿐이다. 재판부는 ‘충분히 설명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난자기증자들이 입증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병원 측이 ‘충분히 설명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도록 요구해야 한다는 상식조차 떠올리지 못한 것인가.

‘과거의 잘못을 되짚는데 의미가 있다’는 자기만족형 판결은 누구를 위한 판결인가?

재판부는 이번 소송에 대해 “황 박사에게 열광해 여성 인권을 도외시한 과거의 잘못을 되짚는데 의미가 있었다”며 “여성 인권보호를 위해 난자기증 절차에 대한 논의가 계속돼야 하며,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황우석 논문조작 의혹이 보도되기 이전부터 수많은 연구자 및 여성단체들이 생명과학 연구의 윤리문제와 난자채취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했지만, 국가차원의 프로젝트에 여성인권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논문조작 사건이 공론화되고 난자기증의 부작용과 위험성에 대한 문제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이후에야, ‘인체를 이용한 의학 연구에서 피험자의 복지에 대한 고려가 과학적∙사회적인 이익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헬싱키 선언)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수준의 인식을 공유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과거의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국가의 이익’이라는 명목 아래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 등 여성 인권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오며 3년이 지난 지금 시점까지 아무런 변화 없이 그 책임을 회피, 방관하고 있는 국가와 의료기관, 그리고 재판부이다. 3년 전에 얻은 상식조차도 발휘하지 못할 만큼 ‘과거의 잘못’은 제대로 평가하지도 않은 채, 언제까지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며 여성에 대한 인권 침해를 방관만 할 셈인가?

이번 재판부의 판결에서 보여준 국가와 관련 의료기관, 그리고 재판부의 인식은 황우석 연구팀의 논문조작 사건 이후 진행되어 온 연구윤리에 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 과정들을 오히려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여성의 인권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는 혐의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마땅히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여성단체들을 지지하며, 무엇보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여성의 인권에 대해 무심한 사회의 반성을 촉구해 온 여성들의 용기에 지지를 보낸다.

2009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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