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깨달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남편과 아이에게 고백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결혼 후 깨달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남편과 아이에게 고백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레즈비언 정체성이 당신이라는 존재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면 가족에게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당신과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생활해 온 식구인 남편과 아이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고 싶을 수 있습니다. 커밍아웃 자체는 어떤 식으로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라고,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문제는 커밍아웃 이후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 말하고 남편과 아이는 그 말을 듣고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레즈비언이라서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싶은 건지, 당신이 레즈비언이지만 결혼 생활은 지속하고 싶은지가 가장 굵직한 두 갈래의 질문이 되지 않을까요? 더불어 남편에게 커밍아웃 하는 방식과 아이에게 커밍아웃 하는 방식은 각각 어떠해야 할 것인가도 고민해 보아야 할 터입니다.

커밍아웃을 계기로 삼아 이혼을 하고자 한다면 당신이 살고 싶은 삶에 대해, 그 삶은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는 이룰 수 없는 삶이라는 사실에 대해, 남편을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레즈비언인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결혼 후에 레즈비언으로 정체화 하게 된 것도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누구나 인생의 어떤 시점에든 성정체성을 새롭게 탐색하고 규정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남편으로서는 당신의 커밍아웃과 이혼 요구가 청천벽력 같은 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남편이 당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과소평가하거나, 믿지 않거나, 노여워하면서 이혼 요구를 거절할 여러 가능성에 대해 두루 생각하고 꼼꼼히 준비하세요.

당신이 레즈비언인 건 맞지만 그 사실 때문에 이제까지 일구어 온 가정까지 해체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라면, 당신이 레즈비언인 건 레즈비언인 거지만 가정은 반드시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당신 안에 확고하다면, 당신은 어쩌면 커밍아웃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잠재우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신은 커밍아웃을 하고, 남편과 아이는 그 사실을 납득하고, 당신과 남편은 통상적인 의미의 부부로서 생활을 한다기보다는 하나의 생활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구성원으로 각각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로 그렇게 역할 분담을 하고 식구로서 살아가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꼭 이렇게 아름답고 이상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세 식구가 같이 노력해서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채 가족을 유지할 길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부로서의 정은 없어도 인간적인 정으로 의리로 가족애로 따뜻한 가정을 이어갈 길이 있기는 있을 터입니다. 하지만 이게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남편 쪽에서 당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레즈비언인 부인과 형식 상으로나마 부부로 가족으로 계속 살아갈 엄두가 안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부부로 지낼 의미를 못 찾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지요. 커밍아웃을 꼭 하고자 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가정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한 다음 실행에 옮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혼을 도모하든 가정을 지키고자 하든 자식에게는 자식의 연령대와 이해도와 성격에 따라 그에 걸맞은 방식을 찾아 커밍아웃을 하는 게 좋습니다. 이때 어머니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 것보다 덜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아이에게 잘 알려주세요. 어머니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좋은 어머니가 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전달하시고요.

커밍아웃은 한 번의 선언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기 비밀을 털어놓은 당사자인 당신을 상대방에게 거듭 이해시켜 나가기 위한 앞으로의 노력이 전부 다 커밍아웃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지난한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세요. 그렇다고 또 지레 겁먹지는 마시고요. 당신의 커밍아웃은 당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 변화들 속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를 권합니다. 기존의 관계를 새로운 형태로 바꾸어 나가기를 두려워 마세요. 커밍아웃 이후 펼쳐지는 상황이 당신에게 가혹하더라도 당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자체를 긍정하는 힘만은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