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2005-05-17

메롱은 나의 첫번째 연인이었다.
지금은 세번째 연인이 되었다.

메롱이 나의 첫번째 연인이던 시절에 나는 머리카락을 등허리 중간까지 기르고 구불구불하게 파마를 해서 사자처럼 휘날리며 다녔다.

그 때 메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사실은 볼 수 없다. 그 때 찍은 사진은 갖고 있지 않다.- 그 때 메롱과 함께 찍은 사진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내 머리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은 여주 신륵사나 강원도 낙산사 둘 중의 어느 한 곳, 커다란 나무 아래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메롱보다 한 계단 낮은 곳에 서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메롱에게 기대 서있다. 메롱의 얼굴은 밝다. 내 얼굴은 슬픈 듯, 거기에 없는 듯 약간 멍하고 슬프다. 그런 표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생각해보니 청순가련이란 말이 떠오른다. 내가 실제로 청순가련하게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메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모두 태웠다. 메롱과 헤어진 후에. 감상적인 기분도 있었겠지만, 긴 머리를 휘날리며 메롱에게 기댄 사진들, 슬픈 얼굴, 또는 예쁜 얼굴, 견딜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을, 메롱을, 무엇보다 나 자신을. 견딜 수 없고 용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귀신이 혼인을 하고 나서 집들이를 한다기에 놀러갔다. 집 구경을 하다가 귀신의 책장에 서 있는 조그만 액자를 들여다 보았다. 귀신의 대학교 졸업 사진이다. 낯익은 여자가 하얀색 정장을 입고 귀신 옆에서 웃고 있다. 귀신은 졸업가운을 입고 있다. 낯익은 여자는 사자 같은 파마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화장을 어찌나 곱게 했는지, 웃는 그 표정은 또 어찌나 낯선지, 저게 정말 내 모습일까?

나 자신도 갸우뚱 거려지고 오래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다. 사진 속의 여자는 너무 낯설다. 정말 나였을까? 이 질문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우리가 정말 살아있었을까, 저 때에? 저 사람은 정말 나일까? 내가 스물 세살이었던 적이 정말 있었을까?

내가, 스물, 세, 살, 이었던, 적이, 정말, 있었을까???

십 년.
십 년이 흘렀다. 대략 긴 듯도 짧은 듯도 한 십 년. 그 동안에 메롱과 나는 사귀고 수도 없이 싸우고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고, 그리고 헤어졌고, 그리고 몇 년 동안은 연락을 끊었고, 다시 만나기 시작하고도 몇 번이나 싸우고 울리고 다시 만나지 말자고 결심하고….

서로가 알지 못하는 길을 걸어 지금에, 여기에 이르렀다.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 세월도 꽤 된다. 어쩌다 한 번 전화하고 어쩌다 한 번 만나고 그러는 와중에도 싸우고, 왜 너는 더 이상 중요한 타인이 아닌데, 아니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가, 나는 왜 네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 묻고 또 묻고.

너무 낯선 사진 속의 내 모습을 본다. 아, 정말…

메롱은 그 때의 내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 모습은 메롱의 마음 속에 있는 이상적인 여자의 모습이겠지. 그 모습과, 현재의 내 모습과, 내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본다. 약간 혼란스럽다.

기본은 ‘현재의 내 모습이 좋다’ 이다. 이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고 또 ‘현재에 충실하자’, 이것도 잊지 말아야지.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로 나를 괴롭히지 말자.
(2005-5-18)
일반
빠알간 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