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아줌마§포르노§] 제7화. 공간과 시간 속의 몸/나

 


제7화. 공간과 시간 속의 몸/나
 
나는 단칸방에 부엌과 현관이 달린 집에 살고 있다. (아, 화장실도 있다.)
반지하 단칸방은 오래되고 배관이 낡아서 언제나 축축하다.
올여름같이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보일러를 틀고 살았다.
하루는 온수, 하루는 난방.
심지어 어떤 때는 따듯한 겨울날에 때는 것보다 더 연달아 불을 때기도 했다.
어제도 난방, 오늘도 난방, 내일도 난방.
 
저녁 퇴근 길에 고가구집 앞에 잠든 홈리스 아주머니를 본다.
고가구를 진열하는 상점 밖 나무 데크 위에 잠들어 있다
길보다 높고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안락해 보이기까지 한다.
며칠 비가 오지 않아서 아마도 데크는 보송보송하고 따듯할 것이다.
잠시잠깐일지라도 아주머니는 편안해 보인다.
사진을 찍고 싶단 생각이 들지만 초상권을 생각하면 자는 아주머니를 깨워서
동의를 받아야 할 일이니 그저 지나간다.
 
저녁 퇴근 길에 고가구집 앞에 잠든 홈리스 아주머니를 본다.
잠든 얼굴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평안하다.
저 아주머니와 나는 다른 사람인가?
정말로?
 
나이 60부터 100살까지 40년 동안 돈을 벌지 않고 산다고 가정하면
그 중간 어디쯤서부터 내가 홈리스 할머니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합리적인 예측이 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 죽자고 뛰는 거 아닌가?
죽자고 일하고 죽자고 자식을 교육 시킨다.
사람으로서 하루 중 얼마 정도는 빈둥거릴 수 있는 자유시간 따위 아무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자라나는 사람으로서 매일매일 어느 정도는 뛰어 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운동하는 아이에게는 기본적인 교양을 기를 수 있는 중등 수업시간조차 빼먹게 만들고,
공부하는 아이에게는 키가 자랄 수 있는 수면시간조차 허락하지 못한다.
뇌도 낮에 배운 것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게 정리하고 저장하려면 잠이 필요한데 말이지.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죽자고’ 사는 것은 합리적인 현실 인식에 기반한 일이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물어보자. 정말,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무상급식도 복지고 국민연금도 복지지만,뭣보다 오늘 하루, 내가 잠시 쉬고 잠시 하늘을 쳐다보고 잠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잠시 인생무상을 생각하고 잠들기 전에 일기를 쓸 수 있는 시간,자식의 허무맹랑한 궁금증을 듣고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이의 눈높이와 아이의 사고방식에 맞게 어떻게 대답해 줄 것인지 창의적인 고민을 할 시간, 청소, 빨래, 음식 만들기 같은 집안일을 매일 전종목은 아니어도 하루에 한 종목 정도는 하면서 집을 돌볼 시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누리는 것이야 말로, 그 시간을 누릴 물리적 심정적 육체적 여유가 있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복지가 아닐까… 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복지는 원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
 
회사에서는 왜 만날 야근을 하지 않는다고 들들 볶을까?
이사님은 왜 금요일마다 퇴근하면서 ‘주말에 나와 일하는 것을 말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사님의 부인의 왜 주말마다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일까?
일이 바쁘다는 것은 사실은 핑계고 하루 정도는 일, 가족, 육아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요거는 나의 상상이지만 틀리기만 하라는 법은 또 어디에 있나?
 
여튼…
직장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고 나는 돈 쓰기를 좋아하고 하루하루 늙어가시는 부모님이 있고
돈에 너무 쪼들리지 않으면서 알콩달콩 살고 싶은 애인도 있으니까,
일을 열심히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그렇다면 지금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인가?
 
아니, 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나뿐 아니라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한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일하고 있다.
그래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일은 해마다 늘어날 뿐이고 우리는 이러다 죽든가 병에 걸리든가 퇴직하든가,
퇴직한 후에 병에 걸려 죽든가 하겠지.
 
도대체 왜 이러고 살아야 하는지 물어볼 일이다.
금요일마다 ‘주말에 나와 일하는 것을 말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사님에게는 저항할 일이다.
대들 일이다.
 
이 달에 방이 두 칸에 거실이 넓은 집으로 이사한다. 여전히 지하다.
지금 사는 집보다 좀 더 깊은 지하방이지만 여태까지 본 것으론 환기는 더 잘 될 것 같다.
크리스와 나는 사는 곳이 좀 먼데,
이번에 이사하는 집은 크리스의 집에서 올 때 교통이 훨씬 편하고 시간도 덜 걸린다. 만세!
 
공간과 시간과 돈이 한꺼번에 다 많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습지생태보고서]라는 만화를 지은 작가는 ‘밥을 굶을 정도가 아니라면 궁상은 생활 방식’**이라고 말한다. 궁상스럽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지만 공감한다.
그리고 내가 궁상스럽게 보이지 않으려고 해봤자,
식후 커피 한 잔도 사 마시기 아까워하는 주제에,
가랭이 찢어질까봐 조심조심 살살 걸어다니는 주제에.
 
 
** 최규석, [습지생태보고서], 거북이북스, 2005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가난이라면 모르겠지만 흔히 얘기하는 궁상 수준의 가난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식일 뿐이다. – 270쪽
 
 
다 썼다고 생각하고 인용문까지 달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홈리스 할머니가 되는 건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가난에 진입했다는 뜻이다.
60살까지 일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
나의 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7~80이 되도록 일하는 것이지만,
그러니까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체력, 정신력, 재력은 그냥 떨어지는 거냐고요…
지금도 체력과 정신력의 한계 근처에서 달랑달랑하는데 말이지요…
 
일할 수 있는 날까지 일하고, 저항과 (가치관) 전복을 수도 없이 고민하고 실행하고,
그러고도 언젠가 홈리스 아주머니나 홈리스 할머니가 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죽든가. 가난이 두려워서 눈을 가린 말처럼 죽자고 달리기만 하기는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