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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05월 20일 19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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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2011 통계,사례,칼럼 연재] (10) 칼럼 1: 신과 함께하는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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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내: 글이 길어 뒷 부분이 잘리는 관계로 문서 파일을 첨부하니 다운로드 해서 글을 끝까지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 한국레즈비언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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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함께 하는 동성애>
     
    1. 들어가며
     
      ‘동성애와 기독교’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쓸 것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때 기분이 조금 복잡해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분명 할 말이 없지는 않은데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들이 많이 녹아있는 주제인지라 객관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주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씁니다’ 라고 먼저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목회 일을 합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가정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에는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적 종교관에 의심을 품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기 직전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고민 끝에 저는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선택은 지금까지도 유효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가치교육의 영향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기독교적 가치와 동성애자 정체성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에 교회에 나가보고 실망하는 일을 최근까지 여러 차례 반복해왔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지금도 저는 중간 어딘가의 영역에 어설프게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종교적 갈등을 오랜 시간 동안 경험해 온 당사자로서 기독교인 동성애자들의 고민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종교적 정체성과 성정체성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탐색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글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상담소의 종교 내담 사례들
     
    종교에 대해서 고민하며 상담소를 찾아오는 내담자의 수는 확실히 많은 편은 아닙니다. 그 동안의 상담통계 자료에 의하면 종교 고민으로 분류할 수 있는 내담 사례는 2005년에 4건, 2006년 5건, 2007년 7건, 2008 4건, 2009년 7건, 2010년 8건, 2011년 5건입니다. 그 중 대다수는 기독교와 관련된 내담 사례입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끊기지 않고 꾸준히 있어 온 내담 주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 고민이 주가 아니더라도 자신, 가족 및 지인의 종교와 그로 인해 갈등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는 내담사례도 다른 고민들 속에 섞여 종종 등장합니다.
    한편 2004년도에 레즈비언권리연구소에서 실시한 레즈비언 실태조사에 의하면 119명의 레즈비언 중 개신교인의 비율은 21.2%, 천주교인은 9.6%로 조사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대비 개신교 신자들의 비율이 18.3%, 천주교 신자 비율이 10.9%(통계청, 2005)인 것을 생각해본다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수치라고 조심스럽게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동성애자 중에 기독교인이 상대적으로 드물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결과입니다. 어쩌면 상담소에 들어오는 내담 수로 추측할 수 있는 것보다 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겠다는 예측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 고민을 쉽게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다면 기독교인 동성애자들은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을까요? 상담소 내담 사례에 나타나는 고민의 유형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모순된 정체성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생긴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어요. 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신앙생활도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어떻게 저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는 거죠? 정말 힘들어요. 기독교 신자들 중에도 동성애자가 있나요? 그게 가능한 일인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에요. 제 삶 자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레즈비언인 저도 저 자체이거든요.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싫어하시니까 회개해야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제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잘못을 빌고 싶지는 않아요. 둘 다 내 모습인데 그게 모순인 것 같고 제 삶 자체가 거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천주교를 믿고 있는데 하느님은 동성애자를 지옥으로 보내시니까 제 종교를 버려야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 매일 인생이 괴롭다고 말해요. 울기도 하고, 가끔 자해도 해요. 살기가 힘들어요.”
     
    “저희 집안은 대대로 천주교를 믿어요. 저도 오래 전부터 예수님, 하느님을 믿어온 터라 종교를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제 성정체성을 배척하고 죄악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부대끼면서 신앙을 지켜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성당도 몇 년 전부터 안 나가고 있어요. 그렇지만 전 정말로 여태까지 힘이 되었던 제 신앙 자체는 지키고 싶어요.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저 같은 사람은 성당에 다닐 수 없는 건가요?”
     
      많은 기독교인 동성애자 내담자들은 기독교인과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 혼란스럽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인 동성애자’라는 말 자체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두 가지를 동시에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둘 중 한가지 정체성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내담자는 교회에 더욱 열심히 나가면서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동성을 향한 끌림을 ‘없애’ 보려고 하기도 합니다. 다른 내담자들은 때로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가져왔던 종교를 버리고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택하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이든 자신에게 중요한 정체성을 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이 선택은 내담자에게 큰 고통이 됩니다. 상담소에 찾아오는 내담자들은 두 가지 정체성이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애타게 묻거나 결국 둘 중 하나를 포기하게 되면서 느끼는 깊은 상실감을 털어놓습니다.
     
    2) 죄책감
     
    “전 그 사람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사랑할 뿐인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왜 이 사랑이 죄가 되는지 알 수 없고 너무나도 힘들어요. 그 사람과 만나면서도 계속 죄책감이 들어서 괴로워요. 그래서 헤어지려고도 해봤고,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스킨십을 안 해보려고도 했지만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도 감정이 제 마음대로는 안돼요. 그냥 사랑하는 것뿐인데도 동성애자들은 죽어서 모두 지옥에 가는 건가요?”
     
    “교회에 가기 싫어요. 설교 시간에 앉아 있으면 제가 죄인 같고요. 어차피 이러고 있어봐야 나는 죽어서 지옥에 갈 테니 천국이고 뭐고 나랑은 상관 없는 이야기인데 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감만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사람에게 동성을 좋아할 수 있는 감정을 주셨는지 묻고 또 묻고 원망하고요. 이것도 사랑일 뿐인데 정말로 용서 받지 못할 죄인가 싶습니다.”
     
    “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엄마에게 동성애에 대해 물어보면, ‘하나님이 성경에서 동성애는 안 된다 그랬어’ 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동성애자라는데 그런 사람들은 어떡해?’ 라고 물어보면 엄마는 ‘그런 사람들은 그냥 평생 혼자 살아야지 뭐’라고 해요. 그렇게 하면 동성애를 실제로 행하지는 않아서 지옥에 가지 않는대요. 사랑하는 것도 그냥 혼자서만 사랑하고, 성정체성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생각하고 평생 그렇게 살면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어떻게 평생 혼자 짝사랑만 하다가 쓸쓸하게 죽지요? 한번 더 이성을 좋아하도록 시도해 보는 것만이 답이겠지요?”
     
    “애인과 키스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레즈비언인 제가 더럽다고 느껴졌습니다. 단지 키스일 뿐이었는데 죄책감이 너무 많이 들고요. 그리고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하는 부분이 육체적인 행위만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좋아하기만 해도 죄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성경에 직접 하지 않아도 음탕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면 단지 여자를 좋아하는 것 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럼 제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봤자 결국 전 죄인일수밖에 없는 건가요?”
     
      어떤 내담자들의 고민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큰 주제는 ‘죄책감’ 입니다. 이 고민을 하는 내담자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했고, 종교적 믿음도 버릴 수 없다고 일단 결정했지만 자신이 종교적 교리에서 죄악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지속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죄책감이 계속된다면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종교에 분노와 회의감을 느끼며 종교를 버리기도 하고, ‘죄를 회개하고’ 이성애자로서 살아가고자 노력해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죄책감과 모순된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종종 함께 나타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어떤 내담자들은 동성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는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실제 연애관계로 발전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혹은 연애를 하더라도 성관계를 비롯한 스킨십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상대 파트너와 갈등을 겪거나 스스로를 억제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호소합니다. 반면 어떤 내담자들은 단지 동성에게 연애감정을 갖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를 저지른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 교제를 하고 관계를 맺는 자연스러운 것들이 동성애자에게는 원천적으로 박탈되었다는 생각에 분노를 느끼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감정은 어쩔 수 없지만 (특히 성적인) 행위는 안 된다’ 라는 믿음을 많은 내담자가 갖고 있는 이유는 동성애를 죄악시한다고 알려져 있는 성경 구절이 모두 성관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보수적 성관념을 내재화하고 있을 때 성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그 깊이를 더합니다. 기독교의 전통적 성관념에 따르면 성관계는 생명을 만들기 위한 성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을 목적으로 한 이성애자 부부 사이의 성행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성관계는 죄가 됩니다. 낙태는 물론이고 피임이나 자위행위, 그리고 동성 간 성관계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섹스는 기독교의 정상주의적 성 가치관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많은 기독교인 내담자들이 성관계로 인해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원인에도 이러한 보수적 성관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
     
    3) 종교 커뮤니티에서의 고립
     
    “신앙은 어렸을 때부터 제게 힘이 되어왔기에 버릴 생각은 없지만, 성당에는 몇 년 전부터 나가지 않고 있어요. 신부님이 ‘죄악 속에 사는 동성애자들이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식으로 강론하시는 걸 듣고 상처를 많이 받아서요. 집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면 했지 그런 곳에 나가고 싶지는 않네요. 혹시 동성애를 인정한다고 입장을 밝혔거나 동성애를 죄라고 부르지 않는 종교는 우리나라에 없나요?”
     
    “용기를 내어 목사님께 상담을 했어요. 그런데 냉정하게 말 하시더라고요. 더 이상 죄 짓지 말라고, 너는 사탄의 유혹에 빠진 거라고요. 더 이상은 그 문제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이상하게 들릴 것은 아는데, 전 크리스천 레즈비언입니다. 교회의 어떤 분께 상담을 받아봤는데 절 가여워하시며 함께 고쳐보자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중요한 건 별로 고치고 싶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저는 여자가 좋고, 여자를 사랑하는 제가 좋아요. 그리고 이런 모습일지라도 전 크리스천이고요. 그렇지만 이런 저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없어 너무 답답하고 외롭네요.”
     
      또 다른 내담자들은 큰 내적인 갈등 없이 자신의 성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을 통합한 상태로 상담소에 찾아옵니다. 이미 그들 몫의 고민을 통해 그 두 가지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봅니다. 이런 내담자는 성정체성을 바꾸거나 오랫동안 가져온 종교를 버려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져있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달리 ‘기독교인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상심합니다. 용기를 내어 종교 커뮤니티에서 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성정체성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목사나 교회의 지도자, 멘토에게 커밍아웃을 하지만 ‘회개를 하자’, ‘악한 영이 들었다’, ‘악마의 유혹에 빠졌다’ 와 같은 강한 거부반응과 만나면서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내담자의 경우에도 설교 내용 중에 동성애혐오적인 발언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교회 커뮤니티에서 동성애자가 결코 환영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면서 커뮤니티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종교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일부분을 각각 숨기며 아주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신앙을 버리지는 않아도 교회를 비롯한 종교 커뮤니티에 참여하는 것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한편, 비종교인 상담자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인 내담자들이 종교 커뮤니티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그로 인한 깊은 고통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 곳에서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왜 그냥 떠나버리지 않는 거에요?’ 라고 물어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 커뮤니티가 내담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거부당했을 때의 좌절감이 얼마나 깊은지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한 이해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의 소속감이 레즈비언 당사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 동성애자에게는 성정체성만큼이나 종교적 정체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종교 커뮤니티에 대한 절실함은 성소수자에게 커뮤니티가 갖는 의미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4) 지인 및 가족의 종교
     
    “어머니는 저에게 직접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하신 적은 없지만 기독교인답게 ‘동성애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죄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실 게 뻔합니다. 만약 제가 커밍아웃을 한다면 어머니는 하나님의 믿음으로 극복해나가자 같은 말을 하실 거에요. 그리고 밤새워가며 절 위한다고 울며불며 기도에 매달리시겠지만 아무리 어머니라도 저에게는 이것만큼 거북스러운 짓은 없습니다.”
     
    “어머님이 애인이 저에게 쓴 편지를 발견하고는 저를 죽이려 드셨습니다. 어머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지라 살인은 용서해도 동성애만은 끝끝내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같이 죽자고 하시더군요. 심지어 제 애인 집에까지 전화를 해 아웃팅을 하고 일이 무척 커졌습니다.”
     
    “엄마가 기독교인이라서 동성애자를 혐오하세요. 저번에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더럽다고 말하셨거든요. 저는 동성애자인데, 절대로 커밍아웃을 하면 안 되겠지요. 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상심이 크실지 벌써부터 죄송스럽네요.”
     
      어떤 내담자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는 별 다른 문제가 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인이나 가족이 기독교를 믿고 있을 때입니다. 내담자들은 커밍아웃을 하거나 아웃팅을 당한 뒤 종교를 가진 가족 및 지인이 보이는 강한 거부반응으로 인해 상처를 받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단순한 혐오 반응을 넘어서 감금, 협박, 폭행, 아웃팅 등의 물리적인 피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내담자들은 가족이나 지인이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절대로 커밍아웃을 할 수 없으며 성정체성이 알려진다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부모님에게 말하고 싶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동성애자들과는 달리, 부모가 기독교인일 경우에 당사자 자녀들은 커밍아웃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며 절대로 들켜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체념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종교를 가진 동성애자들은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성정체성이 공존하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교회 커뮤니티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기독교인인 가족이나 지인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상처 받기도 합니다. 어느 하나 쉬운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고민들입니다.
     
    3. 기독교와 동성애자의 갈등
     
    1) 기독교 --> 동성애자
     
      그러면 왜 동성애 정체성과 기독교 신앙은 도무지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까요? 실제로는 동성애자 중 종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와 비교해서 유의하게 다르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기독교계에서 동성애자를 탄압해온 역사가 가장 큰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보수 기독교계는 동성애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가져왔고 그것을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2003년에는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기준에서 동성애를 삭제하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대해 한국기독교총연합에서 반대 성명을 내고 공개적인 동성애 혐오 발언을 했던 사건이 있었지요. 그러한 기독교계의 호모포비아적인 반응에 크게 낙담한 10대 동성애자 인권활동가이자 천주교 신자였던 육우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일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007년에는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 조항을 넣는 것을 반대하며 동일 단체인 한기총에서 반대 로비를 하고, 결국 성적지향 항목이 빠지게 되었던 사건도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반대광고를 내며 ‘며느리가 남자라니 웬 말이냐’ 라는 어처구니없는 문구를 신문에 실었던 것도 기억나실 겁니다.
      이런 굵직한 사건들을 제하더라도 기독교계에서 동성애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교회에서는 강도 높은 동성애혐오적인 발언이 설교에 단골로 등장하곤 합니다. ‘동성애는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표이다’, ‘동성애자는 에이즈에 걸리고 지옥불에 떨어질 것이다’ 등등의 발언은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정치인들은 동성애 관련 사안에 거의 항상 가장 배타적인 입장을 표시합니다. 당장 동성애자 개개인의 주변에도 커밍아웃을 했을 때 가장 황당하고 기분 나쁜 반응은 기독교인으로부터 왔다는 경험담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널 위해서 기도할게. 회개하고 천국가야지” 하는 반응이나 얼굴을 굳히며 “동성애자는 지옥에 간댔어” 하는 등의 반응들 같이요.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거나 아웃팅을 당했을 때 문제는 단지 기분이 나쁜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교여행이나 기도회에 억지로 끌려가서 회개를 강요 받고 교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악한 영을 퇴치하는’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는 무시무시한 경험담도 종종 들려 옵니다.
     
      최근에는 동성애가 보다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인권 문제가 전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기독교계 내에서도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동성애에 대해 수용적인 기독교인들의 최근 입장을 정리해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동성애가 교리적으로 죄라는 것은 사실이고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은 원죄를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죄인이고 동성애가 다른 죄보다 더 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에 비해 추가된 죄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더 취약하고,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동성애자는 변화되고 회개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그들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내치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약자들을 보듬고 살폈듯 교회에서도 동성애자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근본주의 기독교계의 완강한 반대에 비해 훨씬 완화되고 수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덜 문제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조차 아주 소수기이도 하지만요. 이러한 ‘길 잃은 어린 양’ 관점은 ‘사탄에게 홀린 타락한 죄인’이라는 기존의 주장보다는 덜 폭력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동성애는 죄’라는 입장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주장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동성애자 기독교인들이 가지게 되는 근본적인 죄책감은 교회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될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 종교인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긍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기 위해서는 ‘동성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방식의 수용이 진정한 의미의 수용이 아니라는 점은 꽤 명확합니다.
     
    2) 기독교 <-- 동성애자
     
      그렇다면 동성애혐오적인 기독교 커뮤니티에서 튕겨져 나온 동성애자들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완전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길도 요원해 보입니다. 공식적인 통계치나 연구를 통해 조사된 바는 없지만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 종교를 향해 갖고 있는 지배적인 정서는 일종의 반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특히 기독교는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에서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주제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주류 기독교계의 동성애혐오적인 발언과 행동들이 되겠지만요. 특히 성소수자 커뮤니티 중에서도 퀴어 이론이나 퀴어 문화를 더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집단에서는 종교를 가지는 것에 비해 일종의 ‘세련된 무신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향성이 선호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퀴어 문화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 퀴어들이 이성애자에 비해 미래지향적인 시간성으로부터 보다 자유롭다는 점, 확장된 청년기를 바탕으로 하위문화를 더 오랫동안 누릴 수 있다는 점 등이 퀴어 커뮤니티의 ‘무신론적인 분위기’에 각각의 몫을 더할 것도 같습니다. (물론 현재지향성이나 확장된 청년기 같은 특성들이 퀴어 문화가 이성애자들의 주된 삶의 방식에 비해 유아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러한 특성들이 어떻게 정상주의적인 가치관을 전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종교성과는 어떻게 자세하게 관계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줄이겠지만요.)
      이런 상황에서 어떤 기독교인 동성애자들은 자신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가 조금 곤란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또 다른 ‘커밍아웃’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종교를 가지기를 선택한 동성애자들의 고통과 고민을 ‘성정체성을 완전히 긍정하지 못한 상태의 것, 아직 충분히 퀴어하고 자유롭지 못한 것’ 혹은 ‘덜 세련된 것’으로 생각해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종교를 가지기로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고,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 받아야 마땅하니까요.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비호의적인 분위기를 가진 퀴어 커뮤니티 속에서 기독교인 동성애자들은 이중의 고립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갈등의 지점들을 종교 커뮤니티에서도,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털어놓고 지지 받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아직 이러한 지점에 대해 고민해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성소수자 진영에서 먼저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기독교와 동성애가 화해할 수 있는 방법들
     
    1) 성경에 대한 대안적 해석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계와 성소수자 진영이 오랫동안 갈등관계에 있었고 현재에도 대체로 그러하다는 것은 제법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기독교인 동성애자들은 어떤 집단에서도 완전한 수용경험을 하지 못하고 정체성에 모순을 느끼며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동성애가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 방법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그토록 죄악시하게 된 원인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보는 가장 주된 이유는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명시하는 몇 개의 구절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구절, 레위기의 구절과 로마서의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구절들이 반드시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는 않다는 성서 해석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성서의 ‘맥락’을 살피면서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 바탕을 둔 이야기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에 의하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보다 ‘역사 비평적 읽기’의 관점에서 성서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적합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즉, 성경이 쓰인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성서에서 의도하고 있는 바를 더욱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표현된 문자 너머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읽는 관점입니다.
      반면에 동성애에 대한 구절들이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성서 근본주의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많은 한국 교회들이 갖고 있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문자 그대로 읽기’의 방법을 채택해 성경을 이해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렇게 본문을 해석하지 않고 성경을 쓰여진 그대로 읽는다는 것이 성서를 당시의 사회적 맥락 속에 위치시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옳은 방식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성경은 신의 말씀이 담긴 신성한 경전이고 그래서 역사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적 방법론이 그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는 바대로 객관적이고 맥락 초월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 비평적 읽기의 관점보다 그러한 방법론에서 훨씬 더 빈번하게 성경의 특정 부분을 취사선택해서 오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여러 구절들은 오늘날의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보다 더 어렵다’와 같이 재물을 축적하는 행위를 경계하는 구절은 동성애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기독교에서는 부자가 구원 받기란 아주 어렵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세속적인 성공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는 징표라고 가르치고 있는 교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즉, 물질이나 돈의 문제같이 기독교인 당사자들이 자유롭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근본주의자들은 입을 다물게 됩니다. 그들의 근본주의적 방법론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 구절을 당시의 사회적 맥락과 연결 지어 적절한 의미를 파악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차라리 침묵하기를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먹지 못하는 음식의 종류나 입지 못하는 의복의 종류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면과 아마를 섞어서 옷감을 짜는 일은 부정한 일입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먹을 수 없는 동물입니다. 가재와 새우도 비슷한 이유로 인해 부정하고, 따라서 먹어서는 안됩니다. 이와 더불어 성경에는 노예제를 지지하거나 남녀차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이 많습니다. 생리 중인 여성은 불결하다거나 여자는 남편의 뜻에 복종해야 하고 교회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등의 구절들이 그렇습니다. 성서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도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강조하거나 오늘날의 사회에도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구절이 동성애에 대한 몇 안 되는 구절보다 성경에 훨씬 많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 확연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근본주의자들이 침묵한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문자 그대로 읽기’의 방식을 객관적으로 적용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특정한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상황 속에서 쓰여진 책이고, 그래서 시대적 배경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에는 전부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본주의는 위험합니다. 시대적 맥락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입맛에 맞는 특정 부분만 취사선택해서 가져와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으므로 이것은 문자 그대로 진리이다’ 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비평적 읽기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이 관점 역시 성경에 오류가 있다거나 신의 뜻이 온전히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초월성은 쓰인 그대로의 문자에서보다 그것에 담긴 ‘의미’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입장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고 알려진 성서 구절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반드시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 구절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동성애라는 죄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과 더불어 성경의 다른 곳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인용되는 구절을 살펴보면 상당히 명백하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남색’이 아니라 ‘손님을 환대하지 않은 죄’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로 명시하는 것으로 가장 흔하게 알려진 구절은 사실 동성애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죄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레위기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와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라는 구절입니다.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명백하게 동성애를 죽어 마땅한 죄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맥락을 고려해 읽는다면 그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들이 등장하는 지점인데, 레위기는 ‘성결법’을 명시한 책으로 성결법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부정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서술하고 있는 일종의 도덕법이자 종교적 분류체계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회는 나름의 분류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는 신발을 신고 집 안에 들어가거나 침대에 눕는 것이 ‘더러운’ 일입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지요. 레위기에 명시된 동성애, 혹은 보다 정확하게 남성간 성행위도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당시의 분류체계에 의하면 남성간 성행위는 ‘부정한’, 혹은 ‘더러운’ 일이었습니다. 주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성행위의 유일한 목적은 생식을 위해서라고 생각했고, 삽입하는 남성과 삽입 당하는 여성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된다고 믿었는데 남성간 성행위는 그 기준을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이유로 자위행위나 몽정 역시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거나, 두 가지 직물을 혼합하여 만든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하는 구절들이 오늘날에는 상당히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도 당대의 분류체계가 현재의 것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동성애 역시 ‘죄악’이 아닌, 당대의 분류체계에 의해 ‘부정’한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분류체계에 의한 성결법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에 대한 금기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신약성경에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은 정말로 동성애를 죄악시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역시 역사 비평적 읽기의 관점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 구절에 쓰인 ‘부끄러운 일’이라는 단어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의도적) 오역이 있었으리라고 파악되고 있습니다. 번역 전의 그리스어 원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비전형적인’ 정도의 의미로, 말 그대로 남성 간 성행위가 당시에 특이한 일이었을 뿐이지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단죄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렇듯 동성애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기독교인들이 단골로 들고 오는 성경 구절들은 그 맥락을 파악하고 적힌 그대로의 문자를 넘어 그 의미를 이해하고자 할 때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구절들은 실제로는 동성애에 대한 것이 아니거나 그것이 부정하다고 여겨졌던 특정한, 그리고 제한적인 시대적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부정하다고 여겨진 경우에도 그것이 윤리적으로 죄악시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신발을 신고 침대에 올라가는 것’ 정도의 사회적 금기였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동성애적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서로를 사랑이라고 부르며 연인관계를 맺었던 다윗과 요나단, 레즈비언 관계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는 룻과 나오미가 그 예입니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백부장과 노예 소년의 관계도 인상적입니다. 아마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러한 관계가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에도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1]
      이러한 모든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특정한 결론과 가까워집니다. 성경은 사실 동성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성애가 등장하는 횟수나 그 비중을 살펴보면, ‘이웃사랑’, ‘우상숭배 금지’, ‘약자에게 베풀기’와 같이 성경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에 비해 동성애는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현재 주류 기독교계에서 동성애에 기울이는 과도한 관심은 확실히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
     
    2) 성경의 동성 간 성행위 ≠ 현대 사회에서의 동성애
     
      이렇듯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맥락을 고려하며 해석하는 방식과 성서 근본주의의 방식으로 읽는 관점은 중요한 가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남성 간 성행위’가 오늘날의 ‘동성애’ 개념과 동일하다는 가정입니다. 그 가정을 바탕으로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있다느니, 그게 아니라 오히려 동성애 관계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다느니 하는 논의가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그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동성애,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성애라는 개념이 발명된 것은 인류 역사상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그 전에는 성행위는 개인의 고정된 ‘정체성’으로서의 의미를 전혀 갖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떤 성별에 끌림을 느끼는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게 된 것은 오직 현대 사회에 특수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기록된 동성간 성적인 행위는 오늘날의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으로서의 동성애와 같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당시의 기준들을 오늘날 동성애자들의 삶에 적용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고요. 성서의 구절들을 사용해 현재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을 죄악시하는 것은 더더욱 옳지 못한 일이 되겠습니다. 애초에 그 두 가지는 같은 대상을 가리키고 있지 않으니까요.
      다른 예시를 들어 본다면 더 쉽게 이해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서로 사랑해서 남녀간에 맺어지는’ 형태의 결혼이 등장한 것도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그 전에는 ‘사랑’과 ‘결혼’이 결합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히려 굉장히 이상한 것이었지요. 결혼은 안정적인 경제적 단위를 꾸리기 위한 제도였고,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사랑이 결혼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의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형태의 결혼과 오늘날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결혼이 이름은 같을지라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오늘날의 기준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해서 평생을 같이 살았대. 얼마나 불행했을까?’ 하는 말을 그 때의 사람들이 듣는다면 아마 몹시 황당해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런 결혼으로 인해서 불행해하지도 않았을 것 같고요. 당시에는 그게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결혼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현대 사회의 결혼제도를 목격하게 된다면 이렇게 반응할 것 같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사랑? 부부간에?? 말도 안돼!’ 라고요.
      이렇듯 고정 불변한 것처럼 보이는 제도(결혼, 섹슈얼리티 등)가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역사적 흐름에 따라 그 내용과 의미가 바뀌거나 새로 발명된 것들입니다. 성정체성도 마찬가지이고요. 물론 동성 간 성행위나 동성 간의 친밀한 관계, 사랑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항상 존재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담는 내용들은 언제나 변화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것들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해석하려는 노력들은 항상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서로 같지 않은 것들을 같은 것으로 간주할 때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이후의 논의들에는 필연적으로 오류가 생기게 되니까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동성애자라는 개념은 ‘동성의 상대에게 정서적, 사회적, 성적으로 이끌리는 감정을 느끼는 사람 중에, 이러한 감정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의미의 섹슈얼리티는 현대 사회 이전에 존재했던 적이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성경이 쓰여진 고대 로마 시기에 있었을 리가 없고요. 그런데도 성경에 적혀있는 동성 간 성행위의 구절들을 오늘날의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 될 것입니다. 애초에 그 당시에는 ‘동성애자’나 ‘이성애자’가 없었으니까요. 그러한 무분별한 적용이 오히려 성경을 멋대로 오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이용해 지금 살아가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죄악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살폈던 예수의 모습을 생각하면 기독교 정신이 동성애자를 소외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지고요. 성경의 구절들을 포함해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주류 기독교계의 방식으로 동성애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오히려 반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에서 그토록 맹렬하게 동성애를 비난하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교리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그러한 교리적 몰이해가 이어지게 되었는가 라는 의문에 답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편견에 종교적인 절대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른바 ‘자연스럽지 않은 느낌’에 종교적 믿음이 더해지면서 ‘동성애는 죄악이다’라는 생각이 절대적인 사실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혐오하게 되었다고 믿겠지만 그 선후관계는 잘못되었습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느낌이 먼저 있었고, 그 느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성애 혐오, 이른바 동성애가 ‘자연스럽지 않게’,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동성애가 낯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동성애’가 아주 최근에 등장한 것이기 때문에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겠지요. 다른 말로,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 자체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원래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과 처음 마주치게 되면 먼저 경계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고 하니까요. 아직 그 대상이 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인지, 안전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그 대상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어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그런 ‘낯설고 거북한 느낌’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처음의 그 낯선 느낌에 종교적인 절대성을 부여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3) 우상숭배의 문제
     
    이렇게 맥락을 고려하며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동성애 개념의 상대성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동성애와 기독교가 대립해야 할 이유는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들을 통해 동성애자 정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에 사실은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독교인 동성애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통합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종교와 동성애가 갈등할 더 이상의 이유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동성애자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편, 비종교인 동성애자의 경우에는 이런 모든 논의가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재차 강조하자면 종교를 떠난 맥락에서 이러한 갈등들은 전혀 문제적이지 않습니다. 퀴어 문화나 동성애적인 삶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종교적 정체성과 성정체성을 통합하게 된 기독교인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긍정하면서 살아간다면 충분히 건강한 것입니다. 또, 여러 가지 고민의 끝에 기독교를 더 이상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거부하게 된 동성애자들의 경우에도 종교와 성정체성 사이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종교인 동성애자와 같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 정체성 역시 다른 모든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변화 가능하지만, 종교를 떠나겠다는 판단은 그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하는 것이며 그 결정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문제점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기독교와 성정체성 간의 갈등 속에 남아있게 되는 사람들은 완전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성정체성으로 인해 ‘종교적인 삶’을 거부하고 있는 동성애자들입니다. 카톨릭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냉담’ 중인 사람들이 되겠지요. 앞서 설명했듯이 기독교와 동성애가 화해하고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충분히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여전히 종교와 성정체성 사이에 갈등이 남아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맥락유관적 해석을 통해 동성애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애초에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성 간 성행위가 오늘날의 동성애 정체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요.
      그러한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여러 면에서 기독교와 동성애 정체성은 서로 대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이것은 ‘가치관’과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동성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기독교적 삶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그러한 삶의 방식을 택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서가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로 인해 다른 기독교적 가치관들까지 모두 전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성별역할, 금욕적이고 절제적인 생활 방식, 보수적 성 윤리관, 교회 커뮤니티에의 활발한 참여 등 기존의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요구하고 있는 사항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동성애 금지’라는 항목이 하나 빠지게 되었다고 해서 그러한 요구들이 덜 부담스러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기독교적인 삶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자신의 삶의 방식들을 많은 부분 포기하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즉, 성정체성 자체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갈등하는 동성애자’들은 ‘나는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따라 살 준비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여전히 종교와 성정체성 사이에서 갈등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더 이상 동성애자 정체성이 직접적인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갈등은 ‘우상숭배의 문제’와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우상숭배를 가장 큰 죄악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유일신을 배신하는 행위인 것이지요. 이 우상숭배라는 행위는 구약성서에 묘사되는 것처럼 다른 민족의 신인 바알을 섬긴다거나 하는 행동보다 확장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다른 모든 대상들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에서의 가장 큰 우상은 돈을 비롯한 물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 ‘우상숭배’의 문제를 피해갈 방법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던져 봅니다. ‘당신은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을 따라 살 준비가 되었습니까?’ 지금까지의 삶이 익숙하고 편안해서, 기독교적인 삶은 요구하는 바가 너무 많아서, 내가 지향하는 가치관과는 달라서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과 ‘나’ 사이에서 ‘나’를 선택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그래서 신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의 모습보다 자신이 선택한 방식의 삶을 우선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죄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고민해야 하는 바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이 과연 신보다 돈을, 가족을, 권력을, 안락한 삶을, 좋은 직업 등등을 더 중요시하면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봐야 하겠지요.
     
    4) 마지막 대답: 개신교의 본질로
     
    이러한 우상숭배의 문제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 위해 저는 개신교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개신교적인 교리에 바탕을 둔 답이기에 어쩌면 지금까지 서술해온 것과는 달리 기독교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카톨릭에도 어떠한 방식의 해결책이 있을 것이지만, 카톨릭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가 개신교에 대한 이해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 적절한 종교적 대답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분명 카톨릭에도 우상숭배라는 마지막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고민을 통해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면서 이번 글에서는 개신교로 그 범위를 한정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개신교적인 입장에서 우상숭배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개신교의 가장 본질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연구활동을 펼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종교사회학 연구에서 이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와 개신교 간의 연결지점에 대해 분석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의하면 개신교는 카톨릭과 중요한 지점에서 구분된다고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종교적인 의례와 성스러운 절차들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신자는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나 사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신과 만나고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16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의례와 행위의 강조가 성직자의 권위 남용과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연결되면서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를 구입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며 면죄부 판매를 허용한 것이 카톨릭 교리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악용한 단적인 사례입니다. 그리고 그에 반하는 종교개혁의 결과로 등장한 개신교에서는 고백성사, 미사, 선행 같은 ‘행위’ 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신자 개개인이 직접 신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을 종교의 핵심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개인과 신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교회와 성직자가 있었다면, 개신교에서는 개인이 기도를 통해 직접적으로 신과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차이점은 교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 종교적인 의례 절차들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선행이나 회개도 구원을 담보해주지 않습니다. 믿음이, 그리고 오직 믿음만이 ‘진짜’ 신앙의 징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결국 구원의 여부와 종교인으로서 삶의 방식은 동성애자 개개인이 신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게 됩니다. 지배적이고 ‘검증을 받은’ 성서 해석이 무엇인지, 그리고 권위적인 목사나 사제가 신의 말씀이 어떠하다라고 전하는지 하는 것들은 덜 중요합니다. 성서 독해에 있어서 주교단의 해석을 벗어난 이해를 인정하지 않는 카톨릭과는 달리 개신교에서 모든 사람은 성서 해석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의 기본적인 정신을 벗어나지 않는 한 모든 사람은 성서 앞에서 동등하며 성경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류 기독교계의 성서해석이 무엇인지, 그들이 동성간 성행위를 다루고 있는 구절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으며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문제에 대한 해결 지점도 바로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완전히 떠나지는 못했지만 동성애자 정체성으로 인해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것은 우상숭배의 문제일 수 있다고 서술한 바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보다 더 사랑하며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에 선뜻 헌신하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적 신앙의 맥락에서는 분명 문제적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맥락에 한해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비종교적인 맥락에서 ‘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동성애자로서의 삶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 충돌하고 부대끼는 원인들을 살펴보는 것을 중단하고 무조건적으로 신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상숭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시작은 그 부대낌의 지점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어떤 것이 과연 ‘신의 뜻’인지, ‘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인지 하나씩 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대답은 주류 기독교계에서 말하는 삶의 방식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습니다. 동성애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교리 해석은 많은 부분 근본주의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특정한 방식으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민이 되는 지점들, 도무지 내가 따라 살아야 할 방식으로 인정하기 힘든 것들 모두에 대해 직접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혼전순결주의, 금욕주의, 성별역할분리, 이성애중심주의 등등 자신이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 중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 신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만이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대답을 따라 살아갈 때 우상숭배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결국, 종교와 동성애자로서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이것이 될 것입니다. “정 고민이 된다면, 당신이 직접 신에게 물어 대답을 찾으세요.” 오직 그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대답만이 그 사람에게는 정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동성애자로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나가면서
     
      모든 논의를 정리하면서 개인적으로 상담을 받았던 경험에 대해 잠깐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지난 겨울에 저에게는 몇 개월 간 심리상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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