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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2011 통계,사례,칼럼 연재] (3) 상담사례2: 가족과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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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 상담 사례 2. 가족과의 갈등


    각색 내담글

    여고에 재학 중인 고2입니다. 연애를 두 세번 정도 해 봤지만 지금은 여자친구 없어요. 하지만 학교에서도 그렇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그렇고 친하게 지내는 이반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답답한 세상에 정말 힘이 되는 존재들이랍니다. 여자친구하고 헤어졌을 때는 위로도 많이 받았고요. 저 스스로도 제가 레즈라는 사실 자체로 힘들거나 그렇지 않아요. 이렇게 살 수 있어요. 이렇게 살 거고요. 문제는 부모님입니다. 커밍아웃할 생각 미처 못 하고 있었는데 일이 터져 버렸네요.

     

    저희 집은 뭐랄까 전형적이랄까 지극히 평범한 가정이에요. 아버지는 어렵게 자라셨다지만 지금은 직장 생활 안정되게 하시는 가장이세요. 어머니는 결혼 초까지는 이 일 저 일 하셨다는데 아버지가 자리를 잡으신 뒤부터는 줄곧 전업 주부로 지내셨고요. 그리고 동생이 하나. 

     

    복에 겨운 소린가 싶지만 저와 동생은 부모님의 지극한 관심 속에서 자랐어요. 부모님이 저희들에게 거시는 기대가 큰 편이에요. 당신들이 안정된 삶의 기반을 애써 꾸려놨으니 이제 자식들이 보다 크게 성공할 차례다 하고 생각하시는 기색이에요. 그러다보니 관리가 철저하달까, 저와 동생에 대한 간섭이 심합니다. 학교 생활, 교우 관계, 학업, 과외 등 여러모로 하나하나 확인하세요. 특히 어머니가 그러시죠. 아버지는 주로 어머니로부터 보고를 받으시는 편이고요.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제가 여자 친구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해 오는 가운데 지금까지 안 들킨 게 용하다 싶기도 합니다. 집에서 크게 티를 안 내긴 했지만… 어쨌든 괜찮으려니 하고 방심한 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심했어야 하는데, 한다고 했는데도 저도 모르게 소홀했나 봐요. 제가 학교 간 사이 어머니가 대청소를 하실 참으로 제 방도 한 바탕 엎으신 가운데 보시기에 수상쩍기 그지없는 것들을 발견하신 겁니다. 옛날 애인하고 쓰던 교환일기라던가 제가 낙서삼아 그린 좀 야한 그림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 말이죠. 

     

    이게 이틀 전인데요.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워낙 보이시해요. 가족들하고 같이 나가도 아들 소리 꽤 듣고. 저거 선머슴같아서 어쩔 거냐고 여자답게 하고 다닐 수 없는 거냐고 평소에도 잔소리가 장난 아니었는데 그런 거까지 보셨으니 어머니가 난리를 안 하시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겠죠. 제 휴대폰을 내놓으라고 해서 채어 가시더니 기어이 비밀번호를 캐내시고는 이반 친구들하고 찍은 사진이며 주고받은 카톡이며 또 다 보시대요. 너 미쳤냐고, 정신병자 아니냐고, 왜 이런 애들하고 같이 다니냐고, 왜 여자애가 그딴 그림이나 그리면서 노냐고, 너랑 같이 노는 애들 다 미친년들이라고, 난리가 났어요. 여자랑 여자랑은 친구밖에 못한다고. 인륜이 있고 천륜이 있다고. 너 같은 딸 낳은 적 없다고. 남자애같이 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데 다 자기 잘못이라며, 이러기까지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느냐며 펄펄 뛰셨습니다.

     

    평소에 퇴근이 늦으신 아버지도 그날따라 일찍 들어오셨습니다. 어머니가 진작 전화를 하셨던 거죠. 큰일 났으니 빨리 집에 오라고요. 아버지는 저나 제 동생이 맘에 안 들게 해도 어머니처럼 난리를 부리시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래도 더 무서워요. 너희 엄마가 너에 대해 나에게 한 말이 다 맞는 거면 넌 내 딸 아니라고 해 버리셨다니까요. 스스로 당장 그만두든가 못 그러겠으면 치료를 받으러 가든가 둘 중 하나를 하래요. 집에 인터넷도 끊고 휴대폰도 당분간은 못 쓰게 하겠대요. 하는 꼴 봐서 영 안 되겠으면 학교도 못 다니게 하고 집에만 있게 한대요. 민망해서 어딜 내보내겠느냐고요.

     

    부모님은 저에게 약속을 하라고 하십니다. 다시는 당신들이 저에 대해 이 문제로 신경쓰게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이죠. 약속 못하겠다고 하면 제 친구들, 저 같은 이반 친구들 부모한테도 다 연락해서 부모들끼리 힘을 합쳐서라도 우릴 막을 거래요. 그래도 일단 내 새끼먼저 멀쩡하게 만들고 봐야 하니 저만 정신 차리면 다른 부모님들한테까지 연락하는 건 참으시겠다네요. 자기들도 창피하다고요.

     

    저는 그냥저 이반으로 안 살 순 없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다고요. 부모라면 이해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죄도 병도 아니잖아요. 자식이 불행하길 바라는 걸까요? 제가 틀려요? 이럴 땐 어떡해야 돼요? 도망쳐야 돼요? 참아야 돼요? 


    상담글

    본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에 대한 부모님의 극심한 혐오 반응과 그에 동반된 통제의 강화로 막막한 상황을 겪는 중이십니다. 동성애를 천벌받을 죄악이자 더러운 질병으로 여기는 부모님을 떠나 떳떳하게 혼자만의 활로를 모색할 지, 부모님의 뜻을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며 참고 견디는 편이 좋을 지 갈피를 잡기 어려워 하고 계시네요. 힘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레즈비언으로서의 자긍심에 대한 지지

     

    우선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정체화 하고 그 사실에 거침없이 당당하신 모습에 무한한 지지를 보냅니다. 

     

    우리 사회는 차츰 다양한 성적지향, 성정체성, 성별표현, 성별정체성 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쪽으로 바뀌어 나가고 있습니다. 교육, 노동, 문화, 대중매체, 법제도와 같은 여러 사회 영역에서 꾸준히 변화가 이어지는 중이지요. 그러나 동성을 향한 이끌림이나 동성과의 특별한 친밀함, 교제, 성관계, 가족 형성 등은 여전히 손쉽게 낙인 찍힙니다. 외모나 성격 상 이른바 여자답지 못한 여자, 남자답지 못한 남자에 대한 사회적인 비하나 단속도 아직 강력합니다. 성별 규범과 이성애정상성이 너무도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차별과 혐오가 뿌리깊은 만큼, 자기 자신을 동성애자로 정체화 하는 과정을 겪는 많은 분들이 자기 혐오와 학대에 시달립니다. 자기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확신을 가지기가 어려워서이지요. 

     

    그러나 당신은 이같은 사회적인 편견과 검열의 분위기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가감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친구들과 지지망도 만들었습니다. 정말 근사하고 용감한 레즈비언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바와 같은 어려움을 앞으로도 또 만날 수 있겠지만, 한 고비 두 고비 충분히 잘 넘어갈 역량을 갖추고 계시다 생각합니다.

     

    부모님과의 갈등 상황에서 느낄 괴로움과 분노 공감

     

    커밍아웃 할 계획도 없던 상태에서 갑자기 부모님이 알게 된 상황이므로 몹시 당혹스럽겠습니다. 부모님이 충격에 휩싸여 노발대발 하시는 만큼이나 본인 역시 상당한 충격과 억울함으로 정신없으리라 짐작합니다. 물론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에 거리낌이 없고 이반들과 어울리는 일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나에 대해 알게 되는 사건은 그와는 별개이니까요.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마음에 커밍아웃을 미루어 두셨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하게 될지 안 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당장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내 의도와 상관없이 부모님이 알게 되셨지요. 나의 중요한 비밀을 직접 고백할 기회를 빼앗기고 마셨으니 그 점부터가 많이 속이 상하시겠습니다.

     

    자책하기 쉬운 상황이기도 하겠다 싶습니다. 더 잘 숨겼어야 했는데, 하는 심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을 탓하지는 마세요. 이 상황에서 당신이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자 친구를 사귀었던 경험도 잘못이 아니고, 이반 친구들과의 사이좋은 관계도 잘못이 아니며, 애정과 욕망을 드러내는 내용의 일기와 편지를 보관해 왔거나 취미삼아 야한 낙서를 한 것 역시 잘못이 아닙니다. 이렇게 근본적인 사실들 자체가 잘못이 아니므로 그것들을 완벽히 못 숨겼다는 것 역시 잘못일 수 없겠지요. 자책하기 보다는 차라리 억울해 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사적인 기록들을 파헤쳐 보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화를 내시는 편이 좋습니다. 나로서는 부끄러워할 만한 내용이 아닌데 남들 보기에 이상한 내용이라는 이유로 갖은 욕을 다 먹고 있다는 점에 대해 서러워 하시는 편이 그나마 낫습니다. 나 자신을 탓할 이유만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세요.

     

    세상에서 당신과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존재들, 당신에게 생활의 울타리를 제공해 주는 존재들,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의 앞날에 계속 신경을 쓸 존재들, 적어도 당신의 경우 부모님이란 그런 존재들인 만큼 (부모님이 자식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거나 부모님이 아예 안 계신 경우도 허다한 것이 무수한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그 분들로부터 당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 받는다면 정말 든든할 겁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당신의 상황은 그러한 이상과는 동떨어져 있네요. 부모자식 관계마저 부정하는 폭언이 난무하고,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다면 교육 기회를 박탈하고 가둬놓고 말겠다는 협박까지 이루어지는 와중입니다. 지금 부모님에게는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실 마음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서글프고 힘든 마음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리라 짐작해 봅니다. 어쩌면 지금의 심정으로는 부모님처럼 멀리 느껴지는 존재가 없을 것도 같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스스로 자랑스러운 레즈비언이라고 해도, 나의 성정체성에 대해 쏟아지는 폭언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그 자체가 상처로 남겠지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어머니나 아버지가 심한 말씀들을 하실 때면 그 표현들을 고스란히 담아두기보다 되도록이면 흘려 버리세요. 아무리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이라지만 하나씩 다 귀담아 들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부당한 욕이며 꾸지람들은 본인의 마음 건강을 위해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시다. 무례한 태도를 보일 경우 두 분의 화를 더욱 돋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정작 힘들어지는 건 본인이므로 요령껏 상황에 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상황의 현실적 직시 및 결단 권유

     

    성정체성을 고치고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생활할 것인가, 안 고치겠다고 버티며 극도로 통제당할 것인가. 부모님이 제시한 선택지란 이렇게 두 가지 뿐입니다. 사실 선택지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둘 다 당신을 레즈비언으로 살게 둘 수 없다는 부모님의 뜻을 똑같이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찬가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레즈비언임을 저버릴 수 없고, 그리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지 않을 예정인 당신 입장에서는 부모님 슬하를 떠날 것인가 참고 머물 것인가를 질문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처럼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 한 가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바로 자립 가능성입니다. 지금 당신이 부모님의 집으로부터 도망을 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을 상실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안정적으로 잠잘 곳과 끼니를 해결하고, 내가 원하는 데까지 학업을 지속하고 장래의 직업을 위해 여러 기술을 익히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책임이 오롯이 나만의 몫으로 돌아옵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당연하게 누려온 많은 것들이 갑자기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게 됩니다. 이는 애초에 집안의 지원이라는 혜택이 없이 생활해 왔다면 새삼 고민할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의 경우는 다르지요. 물심양면 지원을 받아온 입장이니까요.

     

    물론, 예를 들어, 가출 이후 청소년 쉼터를 찾아 숙식을 해결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가출 청소년 자립 생활을 지원하는 지역 사회의 여러 프로그램들을 찾아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을 때와 같은 과외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더라도 고교 과정을 마치는 일 정도는 자기 손으로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홀로서기할 방법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결코 녹록한 대안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무엇이 내게 장기적으로 더 도움이 될 지 냉정하게 저울질 해 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많이 부대끼더라도 최소한 성인이 될 때까지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아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지원을 가능한 만큼 누리기를 선택하는 게 나에게 좋을지, 아니면 아무리 가시밭길 같은 십대로서의 자립 생활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들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게 나에게 좋을지, 직접, 결정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계획한 다음에 집을 나갈지 말지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도 중요합니다. 부모님 때문에 슬프고 괴롭고 막막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어요. 어떤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자식 입장에서 다시는 부모님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부모님께 느껴지는 감정과는 별개로 부모님과 인연을 끊기까지 하고 싶으시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싶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망쳐 버리면, 가출해 버리면 나중에 부모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하고 고민하셔야 합니다.

     

    어떤 결단을 내리는 편이 더 좋은지, 더 맞는지, 정답은 없습니다. 내가 고민끝에 결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에 옮긴다면, 그게 바로 내가 갈 길입니다. 최대한 후회없을 선택을 하면 좋겠으나 나중에 혹여 후회할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직접 결정한 바에 따른 일이라면 아무래도 덜 괴롭겠지요. 집을 나가고자 결정하신다면 가출 이후 자립 생활이 안정되실 때까지 필요로 하시는 만큼 저희도 조력자 역할을 하겠습니다. 가출을 실행에 옮기실 경우, 꼭 저희에게 연락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두 가지 생존 전략 소개: 정면으로 맞서거나 우회하길 택하거나

     

    여기서는 집에 머물고자 결정하실 경우 취하실 수 있는 두 가지 대응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정면으로 맞서는 대응법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부모님의 이해도가 많이 낮고 두 분의 편견이 심한 상태입니다. 그런 만큼, 두 분을 이해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당신은 깊이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고 상처투성이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는 도전해 볼 만한 길입니다. 예상치 못하게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나의 정체성이 드러나 버렸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부모님에게 적극적으로 알려 나갈 좋은 기회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왕 드러난 거,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고 인정받을 때까지 고군분투 하는 겁니다. 나는 레즈비언이고 레즈비언으로 살아갈 것임을 굽힘없이 분명히 선언하는 정면 돌파의 방법입니다. 

     

    이럴 경우 기본적으로 부모님이 완강하게 반대하며 극단적인 감시와 통제의 방법을 동원하실 가능성이 큽니다. 당신으로서는 전혀 원치않는 정신과 치료를 강제하실 수도 있고, 교우 관계를 완전히 차단해서 당신을 고립시킬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 말씀처럼 다른 이반 친구들 부모님들에게까지 연락을 취하시기라도 하면 일은 더욱 커집니다. 친구들의 부모님 가운데에는 자식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분들이 더 많으리라 예상하는 편이 좀 더 현실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친구들까지 뜻하지 않게 평지풍파를 겪기 쉽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홀로 감당하시기는 무척 힘들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무슨 상황이 발생할지 미리 모조리 예측해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저희의 도움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으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상담원이 부모님을 꾸준히 만나뵙거나 전화로 이야기 나누며 당신에 대한 부모님의 이해를 도울 수 있고, 부모님과 당신이 함께 참여하면 좋을 가족 상담 프로그램에 연계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동성애자를 가족으로 둔 이들이 한 데 모여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고 이야기 나누는 모임을 소개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만일, 감금, 강제 입원, 폭행 등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빨리 저희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 주세요.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표면상의 평화를 택하는 방법 역시 고려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는 현재 부모님이 요구하시는 바에 맞추어 생활하기를 선택하는 길입니다. 레즈비언으로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겠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부모님의 의심을 살만한 요소들을 생활에서 제거하는 겁니다.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부모님의 신경을 누그러뜨려 나에 대한 더듬이를 최대한 거둬 가시도록 함으로써 내가 숨쉴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지요. 보다 철저한 생활 관리로 딸에 대한 부모님의 신뢰를 회복하여 궁극적으로는 감시와 통제를 약화시키는 게 목표입니다.

     

    물론 진짜로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거나 친구들과의 연을 끊는 게 아닙니다. 다만 잠정적으로 낮게 포복한달까요. 성년으로서 본격적인 자립 생활을 시작할 때를 차근차근 예비하는 겁니다. 오갈 데 없어지는 일을 피하고, 사사건건 참견 당하기를 피하면서요. 시간을 버는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커밍아웃할 기회는 한 번 빼앗겼습니다. 그렇다고 그 이후의 상황을 직접 조율해 나갈 기회까지 빼앗긴 건 아닙니다. 레즈비언임에 떳떳하고 앞으로도 내내 레즈비언으로서 살아갈 것이라고 뚜렷이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뜻이 확고하시니 부모님에게, 네 어머니 아버지, 말씀대로 노력할게요, 동성애 안 할게요, 이렇게 대응하시기가 더더욱 꺼려지실 법 합니다. 나 스스로 나를 부정하는 거 아닌가 싶어 내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시기를 권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조금 멀리 내다 보며 현재를 이용한다고 말이지요. 표면적으로 타협함으로써 나를 지켜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자기 부정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인 자기 긍정이라고 해야 더 어울립니다.

     

    이렇게 번 시간 동안 경제적, 심리적 자립을 준비하길 게을리 마세요. 내 생활을 내 손으로 책임질 수 있게 되면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일을 추진하더라도 한결 눈치를 덜 보게 됩니다. 자립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부모님과의 갈등 구도 속에서 보다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나의 현재와 미래를 더 이상 부모님의 물적 지원에 기대지 않을 때,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정을 내리기도 더욱 쉬워집니다. 만일 정면 돌파가 아닌 우회로를 택해 몇 년 남지 않은 이른바 미성년의 시기를 보내고자 하신다면 그 동안 자립 계획을 잘 세워 내실있게 준비하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물론 이와 같은 표면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과정이 부모님과의 물리적인 가까움은 유지시켜 줄 지언정 심리적인 거리감은 오히려 벌려 놓을 수도 있습니다.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감추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지내는 과정이란 아예 연을 끊는 것 만큼이나 부모님과 나 사이에 깊은 골을 파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나중에 그 거리감을 좁혀 보고자 시도할 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의 친밀함을 더욱 도모하여, 숨겨야만 하는 요소로 인한 거리감을 어느 정도는 벌충할 수도 있을 겁니다. 부모자식 관계란 서로의 전부를 모조리 빠짐없이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만 돈독해지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의 공백만큼 다른 요소들에서 더 정성껏 관계를 만들어 갈 방법을 모색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꼭 당신과 부모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금을 긋는 일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길을 잡아 가시더라도 상담소는 당신의 결정에 따라 응원하겠습니다. 언제나 고민 나눌 준비 단단히 하고 기다릴게요. 고비를 맞이하게 되거든 꼭 다시 찾아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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